[르포] '최 기자의 슬기로운 생활' 천하 제일의 명당, 가리산 제왕의 전설이 깃든 마을 '물로리'

- 오지중에 오지마을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2024-06-07     최신 기자
홍천군에서 춘천시 경계가 시작되는 지점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편집자주 '최 기자의 슬기로운 생활' 시리즈에서는 기자가 직접 다녀본 국내,외 식당, 여행지, 전시회 등 의미 있는 소재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뉴스코리아=춘천) 최신 기자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이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춘천에 속하긴 하나 1972년 소양강댐의 준설로 춘천과는 오가는 길이 완전히 끊어진 이름만 춘천땅으로 정작 춘천에서 물로리를 오려면 소양댐에서 배를 이용해 물로리로 오거나, 홍천군 두촌면을 통해서 오는 길이 있다.

 

강원도 홍천군 관할 국유임도 안내문이 보인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과거에는 저런 험준한 산길을 걸어서 홍천에서 물로리까지 재를 두번 넘어 다녔었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강원도 춘성군 북산면 물로리'; 기자가 기억하는 아련했던 기억 저편에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1981년 당시의 주소다. 소양댐의 완공으로 북산면 일대 화전민들의 마을이 소양호 아래로 수몰된 이후로는 이곳 물로리 사람들의 생활권은 그때나 40년이 더 지난 지금이나 춘천도 춘성군도 아닌 인제와 홍천이다. 이곳에서 춘천을 가려면 어쩌다 한번 있는 배를 타고 나가야 하지만, 홍천과 인제는 자동차로 30분 이면 닿는다. 생필품도 춘천이 아니라 홍천과 인제에서 조달하고 있다. 

소양호로 인해 북산면 중심지와 연결되는 도로는 없다.

 

2024년에 이정도 험난한 산길이니 70년대에는 이곳이 얼마나 오지였을지 상상이 간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그럼에도 행정구역은 수십년이 지나도 아직도 춘천시라는것은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의 입장에서도 이곳을 찾는 객의 입장에서도 납득하기 힘들다. 이제라도 홍천군과 춘천시의 적극적 논의가 필요한 대목이다.

 

홍천에서 재를 하나 넘으니 두번째 재를 넘기 위해 물로리 방향으로 좌회전을 해야 한다. 직진하면 조교리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30여년만에 기억에 의존하면 다시 찾은 이 길이, 과거 걸어서 넘던 그 험준한 산길이라는것이 새삼스레 감회가 새롭게 다가온다. 이 길을 자동차로 다시 오게 될것이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소양호 뱃편 아니면 인제 신남, 양구군을 거쳐서 빙빙 돌아서 오거나, 홍천군 두촌면에서 물로리로 넘어가는 도로(원동 조교로)를 타고 구불구불 고개를 넘어 춘천 북산면으로 진입후, 여기서도 한참을 꼬불꼬불 들어가야 가리산 그늘인 물로리가 나온다.

 

지금 걸어서 다니기에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저 험한 산길을 당시엔 수도 없이 걸어서 다녔었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80년대까지 기자는 저런 험준한 산길을 걸어서 홍천에서 물로리까지 재를 두번 넘어 수차례 다녔었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기자는 강원도가 고향이다, 선친께선 북산면 조교리가 고향이시고, 사촌 고모들이 홍천군 두촌면 원동리, 춘성군 북산면 조교리, 물로리에 살고 있어, 유년시절, 방학때면 할머니 손에 이끌려 산으로 강으로 뛰놀던 곳이다.

서울서, 춘천까지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샘밭을 지나 소양댐 선착장까지 와서 당시 하루 2번 왕복하던 통통배를 타고 2시간 남짓 가야 도착할수 있는 오지중의 오지 마을 물로리!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자동차 밧데리로 라디오를 듣고 등불을 켜던 그런 오지 산골 마을 내평국민학교 물로 분교 운동장에 당시 춘성군에서 영화를 보여준다고 이장님이 전달해주면 온마을 사람들이 다들 모여서 영화를 보던 기억이 지금도 새록새록하다.

2024년에 다시 찾은 물로리에서 오래된 어린시절 기억 하나가 고단했던 일상을 위로해 주는 이곳은 내 고향 강원도다.

 

 

1946. 7. 5 내평국민학교 물로분교장 개교 1963. 11. 22 물로국민학교 승격 1985. 3. 1 상천국민학교 물로분교장 격하 1994. 3. 1 폐교 (자연폐교)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1946. 7. 5 내평국민학교 물로분교장 개교 1963. 11. 22 물로국민학교 승격 1985. 3. 1 상천국민학교 물로분교장 격하 1994. 3. 1 폐교 (자연폐교)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 한켠에 우두커니 서있는 녹슨 축구골대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건강한 몸으로 나라에 충성하자'는 구호가 흐릿하게 보인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1946. 7. 5 내평국민학교 물로분교장 개교 1963. 11. 22 물로국민학교 승격 1985. 3. 1 상천국민학교 물로분교장 격하 1994. 3. 1 폐교 (자연폐교)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1984년 3월 1일 폐교된 상천국민학교 물로분교장의 운동장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이토록 험준한 오지마을, 가리산 그늘인 물로리 남쪽 구석 500m 고지에 외롭게 자리한 은주사까지 들어가면 여기서 다시 절을 지나 남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육지속의 외로운 섬 같은 곳에 한천자의 묘가 나온다. 

 

가리산 중턱에 자리한 한천자의 묘 이정표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가리산 중턱에 자리한 한천자묘는 천하 명당의 하나로 오랫동안 칭송을 받았던 곳으로 한(漢)씨 성을 가진 천자(제왕) 관련 전설이 조금씩 다르게 춘천시와 홍천군으로 나뉘어 두가지 이야기로 흥미롭게 전해지고 있다.

 

춘천시가 세운 한천자 묘의 전설 안내문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한천자 묘의 전설  

 

북산면 내평리 한터마을에서 한 총각이 아버지와 함께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었는데 산소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옆에 가매장해 놓았다.

어느날 저녁에 중이 상좌와 함께 찾아와 머슴방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중은 머슴에게 달걀을 달라고 하여 머슴은 쇠여물 끓이는 가마에 달걀을 삶아서 중에게 주었다.

한밤중에 중이 상좌와 함께 밖으로 나가자 머슴이 몰래 그들의 뒤를 따랐다.

중은 가리산(加里山) 중턱에 이르러 지형을 살펴보고 나서 달걀을 땅에 묻었다.

한참 후에 달걀 묻은 자리에서 닭이 퀘를 치며 울었다.

중은 이곳이 명당자리라고 상좌에게 말하였고, 이곳에 묘를 쓰려면 세 가지를 지켜야 하는데 그것은 금관을 써야 하고, 황소 100 마리를 잡아야 하고, 하관할 때 투구철갑한 사람이 곡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머슴은 이 말을 엿듣고 이튿날 노란 귀리짚 공석으로 부친의 시신을 둘러싸아 가지고 그 명당자리로 갔다.

투구처럼 솥뚜껑을 머리에 쓰고 곡을 하고, 옷을 벗고 황소 같은 이 100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그 명당자리에 묻었다.

머슴은 그 후 중국으로 향하였는데 어느 대처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모여 천자를 뽑고 있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 나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머슴이 북을 치자 북소리가 온 장안에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 춘천 가리산에서는 머슴 부친의 시신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머슴은 중국의 천자가 되었는데 그가 곧 한 천자이다.

세월이 흐른뒤에 중국 황실에서 한천자 부친의 묘가 조선의 가리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치산(治山)하러 오려고 하였으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가리산에 가려면 십년강(지금의 의암댐이 있는 신영강)을 건너 삼천리(춘천시 삼천동 혹은 신북면 산천리)머덩을 지나 구만리 고개(구만이 고개)를 넘어야 한다고 이야기 하니 중국의 황실에서 이 말을 듣고 치산을 포기하였다.

지금도 비가오면 물이 붉게 흐르는 이 곳은 이를 100마리 이상 잡아 죽인 피가 아직도 배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며, 날이 가물고 마을에 흉한 일이 있을 때마다 묘를 파보면 몰래 묻어둔 시신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는 한천자 묘소가 명당이라고 알려져 무덤의 덕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한 암매장이 성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고시 준비를 하는 사람이나 산삼을 캐러 가는 사람이 한천자 묘소에 제를 드리고 벌초를 하기 때문에 묘가 묵는 일은 없다고 한다.

한천자의 묘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한 천자 이야기 

 

'한 천자 이야기'는 묘 자리에 얽힌 이야기다.

옛날 가리산(加里山) 기슭에 한(漢)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도승이 찾아와서 하룻밤을 묵어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한씨 부부는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아들 방에서 같이 자도록 허락하였다.

식사를 마친 도승은 자리에 눕기 전에 아들에게 달걀 세개만 달라고 하였다. 아들은 날달걀은 없고 참으로 먹으려고 쇠죽에 삶은 달걀이 있다며 내주었다.  도승은 달걀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아들이 자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들은 코를 골며 자는 체하자 도승은 삶은 달걀 세개를 들고 가리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들도 도승이 눈치 채지 않게 뒤를 따라 산을 올라갔다.

도승은 삶은 달걀을 하나는 산 정상에, 하나는 산 중턱에, 하나는 산 밑에 묻고는 조용히 산을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들은 도승보다 먼저 산을 내려와 자는 체하였다. 

도승도 방에 들어 자는 체 하며 무엇인가 기다리는 것이었다.

이윽고 동틀무렵이 되자 산중턱에 달걀을 묻어둔 자리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정상에 묻어둔 달걀에서도, 산 아래 묻어둔 달걀에서도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누워있던 도승은 혼자말로 '축시(오전1시~3시)에 울어야 제대로 된 묘 자리인데 축시 중에 울었으나 묘 자리가 맞긴 한데 시(時)가 맞지 않는구나, 천자는 못하고 임금은 하겠다.'며 중엉거리는 것이었다.

이튿날 아침 도승이 떠나갔고 몇년 뒤 한씨 부친이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묘를 제일 먼저 운 산 중턱에 묻고 아들은 중국으로 떠났다. 마침 중국에서는 천자를 뽑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천자를 뽑는 시험은 짚으로 된 북을 짚으로 만든 채로 쳐서 쇳소리가 나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도전해 보았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들은 자신이 치면 꼭 쇳소리가 날 것만 같아 도전하였다. 아들이 짚으로 만든 채로 짚 북을 치니 정말 쇳소리가 났다. 그리하여 천자에 오른 아들은 부친의 묘소를 찾기 위해 사신을 보내 부친의 묘소를 찾았으나 묘소가 한국에 있다고 전해지면 속국이 될까 두려워 '한국에는 지리산은 있어도 가리산은 없다.'고 속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한씨 묘소가 명당이라고 알려져 그 곳에 묻으면 후손이 출세한다고 해서 암매장이 성행했고 암장을 하다가 수많은 시체를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산삼을 캐러 가는 사람은 한 천자 묘소에 제를 드리고 벌초를 하기 때문에 묘가 묵는 일이 없다고 한다.

가리산 자락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홍천군 속한다. 한 천자 묘도 홍천군 관내에 포함된다. @뉴스코리아 최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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