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치매 걸린 황소의 기도 [2화]

고된 농사일로 심신이 닳아도 처녀의 가슴은 꿈으로 가득차 늘 '똥산 언덕'에 누워 취직도 하고 공부도 하고 싶은 꿈 가꿔

2024-07-24     김무성 동포 기자

편집자 주  김무성 기자는 하와이에서 할머니,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살며 현재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본지 최초의 고교생 동포 기자입니다.

또한 김무성 기자의 할머니께서는 치매환자이기에, 한국에 홀로계신 할머니를 하와이까지 모셔온 이유도 치매증상이 심해져 가족의 적극적인 사랑과 보호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김무성 기자는 의료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 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 기자는 뇌신경을 연구해 치매 등 뇌신경 관련 질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에게 삶의 즐거움과 건강한 일상을 제공하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본 칼럼은 김무성 기자가 치매 할머니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보호하며 느낀 점 위주로 시리즈로 작성해 나갈 예정입니다.

아울러 할머니와의 추억과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한편 예비 의료인으로서 할머니가 치매를 극복하도록 도와서 보다 의미있고 아름다운 여생을 살아가도록 지원할 각오로 칼럼의 연재를 시작합니다.

 

황소소녀 우년이는 늘 새로운 꿈을 꿨다. 그 꿈은 소박하지만 강렬했다. @김나혜

 

(뉴스코리아=호놀룰루) 김무성 기자 = 앗긴 들에도 봄은 찾아온다고 했던가. 시간이 흘러 아버지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황소 처럼 궂은 일, 쉬운 일 가리지 않고 일만 하던 우년이도 이제 제법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순하고 착했던 우년이는 사춘기 소녀로 성장했어도 여전히 아버지 말씀에 늘 순종하는 집안의 보물이었다.

우년이는 밥 먹기전에 재너머 산밭에 가서 고추밭 두 고랑을 매고 오라면 그대로 이행했다. 또 얼른 밥 먹고나서 신작로 옆 논으로 달려가 '물고'를 보라면 또 그렇게 했다.

우년이는 감히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면 안된다는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우년이가 아버지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겼던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우년이는 어떻게든 아버지의 마음을 돌려서 학교에 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세월은 우년이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새 또래 친구들은 모두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그들 일부는 인근 중학교로 진학하거나 일부는 수도권 공장으로 취직하러 흩어졌다.

우년이는 농사일을 하다가 짬이 나면 늘 혼자 찾는 아지트가 있었다.

'산 언덕'이었다. 당시 학교를 오가던 어린 아이들은 이상하게도 '똥산' 근처에 다다르면 똥이 마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아이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학교를 오가는 길에 꼭 '똥산' 속 수풀사이에서 똥을 누곤 했다.

이 '똥산' 속에 들어가면 수많은 똥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어서 자칫 조심성 없이 걸으면 영락없이 똥을 밟았다. '똥산' 주변에서는 똥 썩는 냄새가 사계절 내내 진동했다. 

하지만 '똥산' 뒤편의 언덕에 올라서면 똥 냄새를 피할 수 있었다. 반면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우년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면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똥산 언덕'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언덕에 엎드려 아이들이 신나게 떠들어대는 학교에서 있었던 얘기들을 귀동냥했다. 

어쩌면 '똥산'은 우년이에게 또 다른 학교였던 것. 우년이는 똥산 언덕에 누워 파란 하늘을 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이 순간에는 아버지에 대한 무서운 감정도,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해주지 않는 엄마나 언니, 오빠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하얀 구름 처럼 이내 사그러 들었다.

"도 학교에 갔으면 지금쯤 뭘 배우고 있을까. 나도 국문을 배웠으면 소설 책도 읽고, 서울에 간 동네 언니들한테 편지도 쓸텐데...."

어느 순간 우년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우년이는 애써 울지 않으려고 코를 찡긋 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한번 터진 눈물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흘러 나왔다.

"오매 왜 그런댜. 너 답지 않게 왜 울고 그랴. 씩씩한 나여 얼른 그쳐 이, 얼른 그치자 뚝!"

우년이는 스스로 자신을 채근해보기도 했고 다잡기도 해봤다. 그러다가 파란 하늘이 아득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새 날씨는 어둑어둑했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일하다가 갑자기 우년이가 사라져 보이지 않으니 아버지, 엄마, 언니, 옆집 피돌이 엄니까지 떠들썩하게 걱정을 쏟아냈다.

"이게 뭔 일이랴. 이? 내동 일 잘하던 애가 갑작시리 오디로 사라진겨"
"아베가 하두 딸년을 잡아 족치니 신물이 나서 오디로 도망갔내벼. 이를 워쩐댜"

"너무 걱정하지 마슈들. 착한 애가 가길 오디 갔겄슈. 애들하고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아직 날이 저문것을 몰러서겄쥬"

호들갑스럽게 저마다 떠들어대는 우년이의 증발 원인을 묵묵히 듣고 있던 아버지가 냅다 소리 질렀다.

"어허 웬 나리들여. 멀쩡히 일 잘하고 착하던 딸년이 가긴 오딜 갔다구 이런댜. 내가 뭘 잡아 족쳐? 이 여편네는 누가 들으면 내가 자식년놈을 못잡아먹어서 안달난줄 알겨. 잔소리들 그만허구 어여 들루 산으로 찾아나서기나 혀" 

편 우년이가 부시시 눈을 떠보니 아니 여기가 어딘가. 아직도 '똥산 언덕'에 누워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아이구머니 큰일 났네 이거. 우짠댜. 집이서 난리칠텐디"

우년이는 빛과 같은 속도로 집으로 내달렸다. 막 사릿문을 열고 들어서는 우년이를 보고 다들 반갑게 달려들었다.

"아이고 이년아. 오디 갔던겨. 너 사라졌다구 니 아버지 울구불구 난리 았었다"

"마저 마저 어디 다친 데는 읎지 야?"

"아녀유 언덕서 잠깐 누워있는다는게 깜빡 잠이 들었지 뭐여유"

"어험, 하여간 에미나 딸년이나 정신 못차리구서나 밤인지 낮인지 분간을 못헌댜. 으이그 답답혀.. 쯔쯧" 

아버지는 헛기침을 크게 내뱉더니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우년이가 쏜살 같이 아버지 앞길을 막았다.

"아니 이것이 뭐하는 짓이랴? 왜 그랴 너?"

"부지, 학교는 이미 늦었으니께 나두 옆집 옥자 따라 서울 근방으루 올라가서 취직허구 싶은디유!"

아버지 얼굴이 금새 시뻘개졌다.

"뭐셔? 이년이 지금 간댕이가 부었나. 뭐라구 헌겨? 서울 어쩌구 취직 어쩌구?"

"그럼 나는 늙어서 꼬부랑 할매될 정두루 일만 허다가 죽어유?"

"아니 이 답답헌 화상아. 왜 일만 허다가 죽어, 열심히 농사일 배우다가 좋은 짝 챙겨주면 시집가야지"

"싫어유. 일만 죽어라구 허다가 또 인연두 아닌 집구석으루 시집가서 또 일만 허다가 죽으라구유? 시집두 안갈거구, 일두 이제는 뭇허유... 힘들어 죽겄단 말유"

"아니 저년이 군소리 읎이 잘 허다가두 한번씩 꼭 저 지랄이랴. 너 취직 어쩌구 이런 소리 자꾸 지껄이며는 니 오라배더러 타작허라구 헐텨!"

"나두 이제 다 컸으니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헐티유"

"아니 저 잡것이 어따대구 자꾸 앙알거린댜? 너 취직헌다구 어디 가기만 혀. 그날루다가 다리 뭉뎅이 분지러질 줄 알어? 이?"

이때 잠자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베두 어지간히 닥달허유. 재 말 마따나 지가 지금까지 울매나 집안일 도왔슈? 그저 눈만 뜨면 밭이루 들루 논이루 안댕기는 데가 읎이 황소 마냥 일만 했자뉴? 쟈 이제 처녀가 되얐으니 꿈두 있겄지유"

"이 여편네가 어따 대구 끼어든댜. 새끼 교육은 자고로 애비가 엄하게 시켜야 혀. 오냐 오냐 허면 헛꿈 꾸다가 신세 조지는 겨. 서울이 우디 이웃집이간디? 지지배고 머스매고 갔다 허면 헛바람 들어서 사치나 허다가 거렁뱅이 되야서 집구석이루 다시 기어든댜. 뒈질라면 뭔 짓을 뭇헌댜!"

이번에는 어머니가 웬일인지 강하게 우년이 편을 들었다.

"아뉴, 솔구지마을 끝순이네 애들두 국민핵교두 안나왔자뉴? 첫째 개 이름이 뭐여. 한순인가? 그 맏이가 먼저 가서는 성공혀서 둘째 동생 두순이두 데려다가 취직 시키구, 야간핵교도 보내서 공부시킨대유. 한순이가 번 돈으루 그 집이서 논두 다섯마지기나 샀대유"

아버지는 여전히 강한 어조로, 엄부의 전형대로 씩씩거렸다. 

"아 시끄럽다니께? 그건 그 집 사정여. 우리 집이서는 앞으루 공장이니 취직이니 끄내는 년은 번개불이 번쩍 나두룩 혼구녕을 낼겨. 오디 서울인지 평양인지 가기만 혀봐. 그날루다가 내가 호적에서 파버릴 겨"

"이 집 년들은 조신허니 일 배우다가 내가 괜찮는 놈이라구 정해주면 그날루다가 시집 가야는겨"

서슬 퍼런 아버지의 엄포에 어머니도 우년이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우년이의 가슴은 이미 서울로 향해 열려 있었다.

"려 야반도주라도 헐겨. 내 인생 내것이구만. 언제까지 일만 허다가 죽을 수는 읎지 암만"

우년이는 이날 마음속으로 큰 결심을 했다. 아버지 몰래 서울로 도망가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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