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아의 아세안 이야기] 필리핀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흘러왔나?

2022-05-22     김인아 논설위원
@뉴스코리아 김인아 논설위원

 

(부산=뉴스코리아) 김인아 논설위원 = 근원주의자(primordialist)들은 일반적으로 민족(nation)을 사람들이 출생하면서 자연적으로 습득하게 되는 공통의 혈통, 언어, 영토, 정치적 실체, 종교, 관습과 전통 등과 같은 근원적 유대(primordial attachment)에 의해 단일적이고 독립적인 실체로 형성되고 유지되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자연발생적이고 어떤 불변의 속성들에 의해 유년시절 귀속의식이 발달하며 이를 통해 특정 ‘민족’으로서의 정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인간은 민족이라는 소속관계를 갖고서 같은 민족의 성원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며 이러한 집단귀속성(集團歸屬惺)은 인간존재의 핵심적인 부분의 하나로까지 간주한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에 대한 인식은 자연발생적이거나 보편적인 것이 아니며 또한 고정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 도구주의자(instrumentalist)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들은 근원적 귀속의식은 가변적(可變的)이기 때문에 민족의 범주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규정되거나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상호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도 있다라고 주장한다.

즉 민족의 발생은 다분히 자의적이며 인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민족주의(nationalism)는 이렇듯 자의적으로 발생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내에서 형성되어 있는 민족적 충성심을 바탕으로, 민족 공동체가 단순한 문화적인 단계에서 정치적인 단계로 발전할 때 발현된다.

어네스트 겔너(Ernest Gellner)는 민족주의란 민족들이 자의식에 눈을 떠서 나타난 것이 아닌, 민족이 없는 곳에서 민족을 발명해 낸다고 규정하였다.

이렇게 자의적으로 발명해낸 민족은 특정 여건 아래서는 자연스러우며 불가항력의 것으로 만드는 어떤 강력한 외부적 힘에 의해 민족주의로 발전하게 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의 우연성(contingency)을 부정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외부적 힘은 산업화 및 근대화의 과정에서 발생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겔너가 주장하는 ‘산업화’의 개념이다. 그가 정의하는 산업화란 경제주의적 관념론이 아니라 모든 문명 차원에서의 총체적인 혁명을 의미한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민족주의는 역사의 한 단계에서 문명의 혜택의 불균등한 확산으로 인해 번영과 이득으로부터 제외되는 계층이 발생하면서 형성된다.

이는 사회의 계층화 체제로 인한 불평등의 강도와 민족감정의 발양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인데, 문명적 혜택의 고르지 못한 확산으로 차별을 인식하는 집단은 민족적 분리에 의해 차별의 원인이 시정될 수 있다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일련의 ‘문화’는 분리를 통해 ‘소속감’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로 지목된다.

다시 말해 사회가 자연적으로 소속을 인정해주지 않는 경우 특정한 ‘문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갖고 다니게 되며 이렇게 형성된 정체성을 바탕으로 민족적 분리가 시도되는 것이다.

이렇듯 특정한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사회로부터 상대적인 박탈감을 인식한 인텔리겐차의 주도와 숙련도가 낮은 제외 당한 노동자 대중들의 뒷받침을 통해 민족주의가 형성된다.

이러한 민족주의 발생의 메커니즘은 필리핀의 식민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말 필리핀 식민경제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겔너가 주장하는 사회계층의 분화가 발생하게 된다.

필리핀에서의 사회 계층 분화를 통한 박탈 및 차별의 인식은 가톨릭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필리핀 인들은 가톨릭 수사(friar)로의 권리에 대한 인정이 식민세력과 토착인들 사이에서 차별적으로 반영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없는 한계를 느끼고 스페인 지배에 대한 불만을 품게 된다.

이러한 불만을 통해 고등교육의 기회를 누렸던 집단을 중심으로 한, 필리핀 ‘민족’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글은 어네스트 겔너가 주장하는 민족주의 발생의 원리를 바탕으로 18세기 말 필리핀에서 가톨릭 교회를 통해 민족주의가 태동하고 전개되는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762년 영국의 침공을 당한 스페인령 필리핀은 거의 경제적 파산에 이를 정도로 격심한 피해를 맛보아야 했지만, 그 후 필리핀 총독으로 부임한 바스코(José de Basco)에 의해 획기적인 식민지 경제정책이 실행되면서 필리핀은 새로운 무역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다.

18세기 말부터 인디고(indigo), 담배, 사탕수수 등의 상품작물 재배가 장려되면서 필리핀은 과거의 단순한 무역중계지의 역할에서 농작물 생산기지로 완전히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 지배도 점차 체계적인 제도를 갖추어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식민지경제의 활기는 새로운 계층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스페인인들은 식민지 지역의 원주민과 자유롭게 통혼하였고, 그 결과 혼혈인들이 생겨났다.

필리핀에서는 이들 혼혈인들을 메스티조(mestizos)라고 부르는데, 여기에는 필리핀에 정착한 화인들과의 혼혈인들도 포함된다.

이들은 점차 식민지의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를 획득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서구교육을 받게 되면서 새로운 의식을 지닌 계층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을 '개화된 사람'이란 뜻의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s)로 부르는데, 바로 이들에 의해 필리핀은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는 동남아시아 최초의 민족주의를 경험하게 된다.

필리핀 민족주의 의식은 식민지 지배층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라기 보다는 사회 계층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당시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 통치제도는 본국에서 파견된 총독 하에 지역에 따라 기독교 수사의 영향력이 매우 컸다.

18세기 이후부터 총독은 이러한 수사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원주민이나 메스티조에게도 기독교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장려하였는데, 기존의 식민지 지배층이었던 보수적인 수사들의 반발이 대단히 컸다.

이러한 계층 간의 반목질시는 사실상 일루스트라도스들에게 새로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820년부터 라틴아메리카에서 철수한 스페인인(pennisulares)들이 대거 마닐라로 유입되어 이들과 가세한 수사들은 이미 식민지 통치제도권에 정착했던 메스티조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필리핀 식민사회는 급격히 분열하는 조짐을 보였다.

이제 메스티조들은 필리핀 출생이라는 신분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서서히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발적 의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메스티조들은 스페인 출신의 식민지 지배층과 대립하는 인종과 관계없는 출생지 중심의 정체성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수사들의 메스티조의 사제 진출을 금지하는 움직임에 반발했던 일루스트라도스는 이러한 민족주의 의식이 고조되면서 사회 계층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였다.

결국 1872년 폭동을 주도했다는 명목으로 세 명의 메스티조 신부를 처형하면서 필리핀의 민족주의 운동은 시작되었다.

화인 메스티조로 대표적인 일루스트라도스였던 호세 리잘(José Rizal)이 이들 신부의 죽음에 대한 규명적 성격의 소설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인 민족주의가 태동하였던 것이다.

또한, 19세기 유럽에서 성직자 사회의 폐해성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일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필리핀의 일루스트라도스들은 일종의 사회문화적 차원의 계몽주의적 운동(Propaganda Movement)을 동시에 전개해 나가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키게 된다.

1892년 필리핀으로 귀국한 리잘은 주로 경제, 교육적 진보에 중점을 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지만, 식민지정부는 그를 체포하고 격리시킨다.

그 때 일루스트라도스들의 대립을 조장하기 위하여 보니파치오(Andrés Bonifacio)가 극단적인 비밀결사 카티푸난(Katipunan)을 조직하여 일루스트라도스들을 회유하지만, 결국 무위로 돌아가자 오히려 식민지배층에 대항하는 폭동을 일으켜 그들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하였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제력과 교육수준이 부족한 보나파치오에게 일루스트라도스들은 지도력을 허용하지 않았다.

스페인 식민정부는 일루스트라도스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이 점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그들의 중심이 되고 있는 리잘을 처형함으로써 그러한 의식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급격히 변화되고 있는 식민지의 여러 어려운 여건과 환경들은 한번 일깨워진 일루스트라도스들의 자각의식을 더 이상 덮고 있을 수 없었다.

수탈경제의 모습을 지닌 폐해적인 스페인의 식민지배는 보나파치오가 이끄는 카티푸난의 명성을 올려주는 격이 되었지만, 이 때에 화인 메스티조 출신인 아귀날도(Emilio Aguinaldo)가 등장하여 스페인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새로운 혁명가가 출현하게 되었다.

리잘의 사망 이후, 민족주의운동의 지도력을 둘러싸고 보나파치오와 아귀날도가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마닐라 남부지역 카비테(Cavite)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아귀날도는 친척과 그 지역민들의 후원에 힘입어 필리핀 민족주의운동을 주도하였으나 번번히 지도력에 대한 여러 도전을 맞이하여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또한, 스페인 식민정부도 이러한 혁명군의 도전에 대응하여 강력한 군대를 조직하여 맞서 평정을 되찾고자 하였다.

쿠바에서 발생한 미국과 스페인의 마찰은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에게 회생할 기회를 주었다.

미국과의 전쟁으로 필리핀 식민지의 상황을 정리할 수 없었던 스페인은 일루스트라도스의 협력을 구하였으나 이제 미국의 개입과 더불어 확고하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감을 가졌던 필리핀 민족주의자들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홍콩으로 피신하였던 아귀날도가 필리핀으로 복귀하면서 그는 일루스트라도스의 후원에 힘입어 18981898년 6월 12일 필리핀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정부를 원했던 아귀날도의 주장에 대해 그의 고문이며 일루스트라도스를 대변했던 마비니(Apolinario Mabini)는 공화국의 설립을 설득하였다.

새로운 독립정부에는 카티푸난과 같은 극단적 단체가 공생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또한, 경제적 부와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일루스트라도스 계층들의 지지 없이 필리핀 공화국은 성립될 수 없었기에 이들과의 국가구조에 관한 논의는 가장 우선적인 과제가 되었으며 결국 아귀날도는 일루스트라도스의 주장에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파리평화협정으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기로 결정한 미국에 의해 아귀날도의 필리핀공화국은 제대로 출범하지도 못한 채 무산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회의 격렬한 토론 끝에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의 제안을 상원이 비준함으로써 1899년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령이 되었다.

미국은 일루스트라도스와 아귀날도의 지역세력을 분리시킴으로써 필리핀의 저항을 막아냈으며, 스페인 저항세력들도 평정함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해 일루스트라도스를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맥킨리 대통령의 주장대로 "미국은 필리핀인들을 교육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문화수준을 끌어올리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취지는 일루스트라도스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원래 일루스트라도스들은 아귀날도를 자신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계층으로 인식하였다.

도시민이며 최고의 교육을 받은 일루스트라도스들은 지방민이며 무지한 아귀날도를 자신들과 같은 계층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루스트라도스들을 설득하는 것은 미국 정부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일루스트라도스들은 미국 정부와 타협하는 것이 훨씬 나은 비전을 지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지지세력을 잃은 아귀날도는 저항세력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1900년경 필리핀 발전계획의 토대를 마련한 미국은 필리핀의 민족주의가 종교적 측면에서 발생하였다고 여겨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는 정책을 실시하여 이제 필리핀은 세속적 행정제도에 입각한 식민지국가가 되었다.

미국에 강력하게 대항할 만한 민족주의 세력을 갖지 못한 필리핀은 과연 진정한 독립을 얻게 되는 시기가 언제가 될 것 인지에만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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