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호 특파원의 사진으로 떠나는 코카서스 여행-11

백만 송이 장미 와 조지아 국민 화가 피로스마니 1

2023-08-18     박철호 특파원
조지아의 국민 화가 피로스마니의 고향 지역인 "사랑에 도시"라고 불리우는 해발 800미터에 위치한 "시그나기'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2천명 정도 사는 작은 도시 시그나기 전경과 만년설이 보이는 코카서스 산맥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편집자주 박철호 특파원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오랫동안 거주하면서 여행정보, 유학정보, 현지 소식등을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코카서스 여행을 박철호 특파원과 사진으로 함께 떠나 보시기 바랍니다.

 

(뉴스코리아=트빌리시) 박철호 특파원 = 국의 대표 가수인 심수봉이 불러 한국에서 유명해진 ‘백만송이 장미“ 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한국 노래 인줄 알고 있다.

사실 원곡은 라투비아 민요 마라(마리, 마리나 모두 같은 이름이다)가 준 선물이라는 민요이다.

 

평생 한 여자만을 그리워하고 

생을 마감한 불우한 천재 화가 피로스마니

러시아 노래 “백만송이 붉은 장미(Миллион алых роз)는 라투비아 민요에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이며 작가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Андре́й Андре́евич Вознесе́нский )가 가사를 쓰고 러시아 국민 가수라고 일컬어지는 알라 보리소브나 푸가쵸바(알라 푸가죠바 Алла Борисовна Пугачёва)가 불렀다.

안드레이 보즈넨스키는 어머니에게 조지아에 가난한 천재 화가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가 기본이 되어 백 만송이 가사를 쓰게 되었다고 전해 진다.

라트비아의 원곡은 981년 작곡된 민요인 '마라가 준 인생(Dāvāja Māriņa)' 이다.

‘백만송이 붉은 장미“는 소련의 국민 가수 알라 보리소브나 푸가쵸바(Алла Борисовна Пугачёва)가 부르면서 대중에게 알려졌으며 핀란드와 스웨덴, 헝가리 한국, 일본에서도 번안 되어 널리 알려졌다.

 

시그나기에 설치된 피로스마니의 그림 "당나귀 타고 왕진 가는 의사"을 동상으로 만든 작품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피로스마니에 "당나귀 타고 왕진 가는 의사"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백만송이 장미”의 가사는 한국, 러시아, 그리고 라투비아 모두 가사 내용이 다르다. 다음시간에 각국 노래에 대해 이야기 하기로 하고 이번 시간에는 국민화가 피로스마니의 그림과 생애 그리고 러시아 가사인 “백만송이 붉은 장미”와 관련된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를 만나보자.

 

올드 트빌리시에 있는 양을 안고 있는 피로스마니 동상 주변에는 붉은 장미들이 있다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Niko,Pirosmanashvili는 단순히 Nikala ,Niko(1862–1918) (니콜라우스, 니콜라, 니키, 니카, 니콜라즈, 니콜라스, 니콜라오등은 모두 같은 이름으로 산타클로스의 이름이 유래된 성 니콜라스에서 온 이름이다.) 또는 피로스마니(Pirosmani) 불리며 사후에 명성을 얻었던 조지아의 순정파 (로멘티스트) 화가다.

그는 생애 동안 대부분의 시절이 가난했으며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의 소박한 삶은 그의 작품속에 녹아 있어 당시 조지아 서민들의 소박하고 일상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알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피로스마니는 현재 조지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예술가의 한명으로 국민 화가가 되었다.

피로스마니(Pirosmani)는 트빌리시에서 130키로 떨어진 '사랑의 도시'라고 불리우는 “시그나기(Sighaghi)” 지역에 작은 마을 “미르자아니(Mirzaani")에서 농부 가정에서 태어났다 .

그의 부모 인 Aslan Pirosmanashvili와 Tekle Toklikishvili는 시그나기 지역에 평범한 가족처럼 소 몇 마리와 작은 포도원을 소유 한 농부였다.

 

피로스마니의 고향인 미르자아니에서 바라보는 풍경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그는 8살에 고아가 되어 그의 두 누나들인 Mariam과 Pepe의 보살핌을 받게된다.

그는 1870년 그들과 함께 트빌리시로 이사 하여 1872년 트빌리시 중앙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부유한 가정의 하인으로 일하며 러시아어와 조지아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피로스마니는 정식 학교를 다니지 못해 특별한 학력이 없다,

8살에 고아가 되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피로스마니는 누구에 영향도 받지 않고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고 배웠다.

돈이 없었던 그의 그림은 대부분 캔버스가 아닌 검은 기름이 발라진 천이었다.

주 재료인 물감은 간판등을 그리고 남은 물감으로 그렸다 .

물감 살 돈도 없고 캔버스도 없었던 그의 그림은 검은 바탕에 단순한 색이 주류를 이룬다.

 

검은색 바탕에 그려진 피로스마니의 대표작중 하나인 "어부"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1882년에는 친구인 기오르기(George Zaziashvili)와 함께 그림 작업장을 열어 극장 간판, 상가 간판등을 그리는 일을 시작 한다.

그러나 이일은 돈 벌이가 되지 않아 1890년에 그는 트빌리시 중앙 기차역에서 철도 검표원으로 취직을 하게된다.

철도 검표원으로 일하며 시간이 날 때 마다 사람들의 초상화 , 극장 포스터, 가게 간판등을 그리며 돈을 모은 피로스마니는 1893년에 고향인 미르자아니에 낙농업을 하면서 유제품과 꿀을 판매하는 가게를 트빌리시에서 운영한다, 또한 식당 겸 두까니(Dukhani = 선술집 또는 호프집, 맥주집, 펍)을 동업으로 운영하였다.

대중들에게 전해지는 이야기는 피로스마니가 가난한 화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낙농과 선술집 운영등으로 제법 돈을 벌어 그의 고향인 미르자아니에 자신의 집을 건축하기도 했다.

 

피로스마니가 직접 건축했다고 하는 미르자니의 그의 집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미르자니의 집 내부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피로스마니의 미르자아니 집에 내부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트빌리시와 고향 미르자아니를 오가던 피로스마니는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온 3류 여배우 “마가리타(1885년생으로 추정)”를 사랑하게되고 결국 그 사랑으로 인해 선술집은 1907년경에 문을 닫는다

1907년(또는 1905년 이라고도 전해진다) 45세의 노총각 피로스마니는 22세에 젊은 3류 배우 “마가리타”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마가리타를 사랑했던 피로스마니는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는 트빌리시의 가게와 선술집 그리고 그의 전 재산을 다 팔아 100만 송이 장미를 사서 마가리타에게 선물 한다.(100만이라는 숫자는 정확한 숫자가 아닌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마가리타“가 피로스마니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연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 버려 실연의 상처로 불행하게 생을 마감 했다고 하나 피로스마니 박물관 관계자와 주변을 취재해 본 결과 피로스마니의 고백을 받아 드린 ‘마가리타’는 약 40일이상 피로스마니와 함께 트빌리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화려한 삶을 살았던 마가리타는 결국 미련 없이 프랑스로 돌아가고 혼자 남은 피로스마니는 전 재산을 다 잃고 결국 가정집, 건물등에 칠을 하거나 기차역에서 짐을 옮기는 노역과 상점 간판을 그리고 초상화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한다.

 

미르자아니 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 피로스마니가 1909년 마가리타를 그렸던 "꽃을 든 여인" 의 전시회 포스터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프랑스에서 온 배우이자 댄서, 가수 였던 마가리타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1916년 “조지아 예술인 협회”에 초청되고 “조지아 사람들‘이라는 신문에 그의 그림이 소개 되나 보수적인 조지아 전통 예술계와 미술계에서는 피로스마니를 천시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화려한 색감에 사실주의적 화풍이 주류를 이루었던 조지아 미술계에 어두운 단색위주에 피로스마니의 그림은 미술계에서는 이단아로 여겨졌다.

전통 예술계에서 배척 받은 피로스마니는 더욱 큰 상실과 좌절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2년뒤 그는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 당시는 1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던 시기 이기도 했다.

 

피로스마니와 같은 시대에 조지아를 대표했던 화려한 색채와 사실주의 화가 "라도 구다쉬빌리" 작품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라도 구다쉬빌리의 작품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피로스마니 시대에 주류 화가 였던 "기오르기 가바쉬빌리" 작품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화려한 색채의 기오르기 가바쉬빌리의 "시장"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그의 마지막 여정은 오직 떠나간 ‘마가리타“만을 그리워하며 술로 실연의 아픔을 달랬고, 초상화와 간판을 그려주고 돈 대신 술을 받았다. 

트빌리시 기차역에서 짐꾼을 하며 생계 유지를 하지만 기력이 약해진 피로스마니는 술을 마시기 위해 피를 팔았고 그 돈으로 또 술을 마셨다.

결국 피로스마니는 트빌리시 기차역 주변 작은 골방에서 1918년 4월 스페인 독감에 감염 되어 영양 실조와 간 부전으로 사망하였다.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자식도 없었고 그의 무덤이 어디인지도 등록 되어 있지 않다.

 

 

다음시간은 피로스마니의 사후 평가와 파리 루브르 발물관에서 전시 되었던 전시회 이야기를 준비 중이다.

 

부유한 집에서 하인을 했던 피로스마니는 귀족들의 만찬(수프라) 그림이 많다, 당대 주류 화가들의 색채와 화풍과 피로스마니의 그림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피로스마니의 만찬 (수프라 ) @뉴스코리아 박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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