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배낭 메고 떠나는 세계 여행(5) - 항일 독립운동의 발자취 가득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뉴스코리아=블라디보스톡) 최신 특파원 = 러시아 극동지역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최동단에 위치한 도시로,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로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관광지가 많아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매력적인 여행지중 한곳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로는 해양공원, 아르바트 거리, 독수리 전망대 등이 있다. 해양공원은 블라디보스톡의 대표적인 산책로로, 시내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아르바트 거리는 유럽풍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로, 다양한 상점과 음식점, 카페 등이 밀집해 있다.
독수리 전망대는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로, 시내 전경과 금각교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이외에도 블라디보스톡에는 루스키 섬, 블라디보스톡 기차역, 개선문, 영원의 불꽃, 굼 옛 마당, 츄다데이 등 다양한 관광지가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한국에서 비행기로 약 2시간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이 좋으며, 물가가 저렴한 편이라 부담 없이 여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한국인 여행객들을 위해 다양한 관광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어 안내를 제공하는 투어 프로그램,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식당 등이 늘어나고 있으며, 한국어로 된 관광 안내 책자도 발간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새로운 관광지로 떠오르며 한국인 여행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블라디보스톡은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공존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도시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한다.
기자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연결되는 9,288km 시베리아횡단 열차(아에로 익스프레스)를 직접 탑승해보기로 했다.
아쉽지만 일정 관계로 2시간 가량 거리인 우골나야역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우골나야역(러시아어: Угольная вокзал)은 러시아 극동 연방관구 트루도보예에 있는 철도역이자 철도 분기점이다.
이 역은 무라비요프-아무르스키반도 북쪽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로 알려진 아에로 익스프레스가 정차한다.
이곳은 한국인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직접 둘러볼수 있는 곳이기도 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우수리스크가 인접한 역이다.
우골나야역에서 나오면 시골역 답게 한가로우면서도 러시아 다운 이국적인 모습이 펼쳐진다.
또한 러시아 연해주는 중국의 만주처럼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을 불태운 곳이다.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동의회, 13도의군, 대한국민의회(최초의 임시정부) 등이 설립된 항일무장투쟁의 기지였다.
우수리스크 남부 연해주 라즈돌나야 강줄기 근처에 독립운동가 이상설(1870~1917) 선생 유허비가 있다.
헤이그 특사 등 조국 독립을 위한 대외활동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몸을 아끼지 않던 그는 독립운동 중 병약해져 우수리스크로 옮겨 요양하였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17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언에 따라 유골은 지금의 라즈돌나야(솔빈)강에 뿌려졌다.
또한 이곳은 스타로레첸스코예 옛 발해 솔빈부 평지성터가 인접한 곳이다.
발해는 8~10세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리며 동북아시아의 문화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발해는 전 국토에 5경(京)·15부(府)·62주(州)를 설치했는데, 솔빈부는(率賓府)는 15부 중의 하나다.
솔빈부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설치되어, 고려시대 중국 북부를 차지한 금(金)나라 때까지 존재했다. 이 솔빈부에서 발해의 옛 성터가 발굴되었다.
아울러 우수리스크에는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 운동가이며 전로 한족 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한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던 집이 있다.
그뿐 아니라 1차 세계대전 발발이전까지의 국외독립운동의 충추기지이자 일제강점기 블라디보스톡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집단거주지 하바롭스키야거리에 위치한 신한촌기념비를 빼놓을수 없다.
국내 3·1만세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연해주에서도 3월 17일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올랐으며, 일찍이 독립운동가들이 한민학교 등을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해조신문> <대동공보> <권업신문> <대한인정교보> 등을 발간해 105인사건, 의병운동 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이상설·이위종·이준 열사는 부산-블라디보스톡-상트페테르부르크(러시아의 문화 수도로 불림)-헤이그 경로로 러시아에서 기차를 타고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했다.
1863년 최초로 연해주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했으며, 1865년 니콜리스크(현재의 우스리스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1860~1870년대에는 하바롭스크, 사만리, 블라디보스토크에도 한인촌을 개척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운동이 탄압을 받자 급격하게 정치적 망명이 증가하여 최소 6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의 한인이 러시아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소련 정부는 블라디보스톡 중심지에 자리 잡은 한인촌 ‘개척리’를 콜레라 창궐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철거시켰고, 서북 변두리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지시하여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 정권은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한인들의 강제 이주를 결정했다.
또한 한인 지도자 2천 5백여 명을 첩자로 누명 씌워 숙청했다.
연해주 일대에 흩어져 살던 우리 민족 17만 명은 모두 라즈돌리나야 역으로 집결되었고, 목적지도 모르는 채 빈 손으로 쫓기듯 지붕도 없는 가축용 화물열차에 올라탔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혹한 속에 40일간 6천 킬로미터를 내달렸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이들의 종착지는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이었다.
우리 민족은 땅굴을 파고 엄동설한을 견디며 황무지를 개간하여 삶을 이어갔다.
이렇듯 광야 같은 러시아 한인 역사에서 손꼽을 만한 큰 비극이 두 번 있었다.
첫째는 러시아 만세 운동에 일제가 보복한 1920년 4월 참변이며, 둘째는 독립투쟁론을 후퇴시킨 6월 자유시 참변이다.
독립운동의 불길에 놀라 탄압에 나선 일제는 1920년 4월 4~5일 이틀에 걸쳐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는데, 일본 군대는 연해주의 한인 거주지를 무차별 습격하고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마을을 파괴했다.
당시 신한촌에서 사망한 한인의 숫자만 무려 300여 명에 이르며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 선생도 우스리스크에서 총살 당하는데, 현재 우스리스크에는 이때의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간도에서 양민 학살을 자행하며 독립군을 압박하는데, 이때 각 지역의 독립군 부대는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하고 자유시(스보보드니)에 결집하여 새로운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이라는 비극이 일어나는데, 발단은 아이러니하게도 홍범도 장군이 포함된 통합 부대의 군권 장악을 둘러싼 권력 투쟁 때문이었다.
러시아군의 공격과 독립군 부대 내의 무력 갈등으로 인해 3천 5백 명에 달하는 독립군 부대 전체가 궤멸하는 참담한 이 사건으로 인해 독립전쟁론은 급격히 후퇴하게 된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된 것은, 소련 해체 이후 1993년 러시아 국회가 고려인 강제 이주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공식적으로 머리 숙여 사과하고 고려인 명예회복 법안을 채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생긴 고려인들은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정착하여 안정된 삶을 살아갈수 있게 된다.
러시아에 의해 강제 이주 되었던 고려인과 그 후손들은 1993년 이전까지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고, 이후에도 조국인 대한민국에서 조차 국적을 인정받을 수도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윤석열 정부가 재외동포청을 출범 시키면서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이자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한 선조들의 후손인 우리 고려인 동포들의 영주귀국지원, 고려인 정착 마을 지원확대등 다양한 동포 지원책등이 시행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아르바트 거리 근처에 위치한 킹크랩 전문 레스토랑 주마(Zuma)는 일본의 이자카야 스타일 레스토랑 체인이다.
2002년 Divia Lalvani, Rainer Becker 및 Arjun Waney가 공동 창업한 Zuma는 전세계적으로 14개 장소와 8개의 계절별 장소를 보유하고 있는 레스토랑으로 메인주방, 스시 카운터, 로바타 그릴등 3개의 주방을 운영한다.
한국의 절반 가격으로 킹크랩을 즐길수 있는곳이긴 하나 사전예약이 필요하다. 예약안하고 방문하면 킹크랩을 구경할수 없으니 참고 하기 바란다.
혹시 동행한 일행중 생일인 사람이 있다면 종업원에게 바로 알려야 한다.
주마 레스토랑의 모든 종업원들이 작은 케익에 촛불과 함께 단체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특별한 이벤트를 경험할수 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시대인 1893년에 완성된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백화점이면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건축물인 굼 백화점.
1917년에 발생한 러시아 혁명의 시점에서 점포 수가 1,200개였으며, 혁명 후 굼 자체는 소련 정권에 의해 국유화 되었지만, 개인 상점은 그대로 영업을 인정 받았다.
그 후 소련 성립 전후로 경제 정책의 변경을 거쳐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한 독재 체제 하에서 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28년에 굼의 모든 점포는 국영화되었다.
그 후에도 굼은 모스크바의 소비 생활의 중심이자 소련에서는 몇 채 밖에 없었던 '물자가 부족하지 않은 상점'으로 소련 경제의 쇼윈도 역할을 했다.
1985년에 등장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라 굼에서 개인 상점이 부활하기 시작하여 서방 자본주의 국가 기업과의 합작한 상점이 진출했다.
소련 붕괴에 따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가 부활 한 후 1993년예고르 가이다르 등에 의한 급진적인 경제 개혁 노선에 따라 굼도 민영화되었다.
이 때 기존의 '국영 백화점'에서 '종합 백화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러시아어로는 국영도 종합도 "G"로 시작하는 맞춤법 때문에 GUM의 약어가 계속 사용되었다.
또한 붉은 광장에 접해 있어 과거의 입구가 다시 개방되어 굼은 러시아 혁명 이전의 모습으로 회귀했다.
2005년에는 러시아의 명품 유통 그룹이 대주주로 취득하고 현재까지 경영권을 쥐고 있으며, 굼에는 200여개 점포가 현재 영업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블라디보스톡의 굼 백화점도 모스크바처럼 혁명광장에 접해 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쁜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푸시킨 극장은 러시아 민속 공연을 볼 수 있는 극장으로, 'APEC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던 '극동 연방 대학교'의 부속 건물이다. 러시아 출신의 시인이자 소설가 '푸시킨'을 기념하기 위해 1908년 설립되었으며, 그의 동상이 건물 옆에 자리하고 있다.
또한 1917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한 '기독교 전도회'가 개최된 곳으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푸쉬킨 극장(Pushkinsky Theatre)은 러시아 혁명이후 이곳은 사회주의자들의 회의 및 연설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한인들의 집회장소로 이용되었다.
1917년 4월 15일 이동휘(李東輝)는 푸쉬킨 극장에서 기독교 전도회에 참석하였다.
이 전도회는 한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일본·중국인 교인들이 참석하였는데, 참석자 중에는 한인 약 100명, 일본인 30명, 중국인 1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날 김학준(金學俊)이 한인대표로 연설하였으며, 윤능효(尹能孝)는 창가대를 이끌고 입장하였다.
이동휘는 신도들을 조직적으로 이끌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다음날인 16일 신한촌 내 김낙선 집에서 독일정탐 혐의로 러시아헌병대에 체포 되었다.
푸쉬킨 극장의 내부는 리모델링을 하여 변화가 있으나 외관은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맞은편에는 최초로 한국어 교육이 시작된 동양학대학(한국·중국·몽고·일본)이 있어 연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의미 있는 곳중 한곳이다.
『뉴스코리아 특별기획』
배낭 메고 떠나는 세계여행은 계속해서 연재 됩니다.
다음편은 일본 돗토리현, 시마네현 편이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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