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부랑자들의 어머니, 분당횃불교회 이재희 목사, 코피노를 품에 안다.
(뉴스코리아=분당) 최신 기자 = (편집자주: 분당횃불교회 이재희 목사가 종교계에서 최초로 뉴스코리아가 주관 운영하는 한국인구정책연구회에 후원을 시작했다. 이에 본지에서 직접 분당 횃불교회를 방문하여 코피노 한글역사문화교육에 후원을 결심하게 된 이재희 목사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도움을 주고 교회에 나오라고 하는건 자발적 신앙이 아니고 강제성을 띄잖아요 그럼 자꾸만 교회에 뭔가를 바라게 되고 신앙은 깊어질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조건이라는건 없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이재희 목사 인터뷰 본문中
지난 6월 기자는 우연히 제주에서 분당 횃불교회 이재희 목사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이하 세기총)에서 주최하는 다문화 가정 초청 부부세미나에서 이 목사와 코피노(필리핀인과 한국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에 관한 담소를 나누다 갑자기 눈시울 붉어지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이 목사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 기회가 되면 다시한번 이 목사를 만나 얘기를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목사를 다시한번 만나보고 싶었던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이재희 목사는) 왜 저렇게 눈물을 흘리는것일까?
기자는 단지 캄보디아와 몽골리아등에서 빈곤층 선교사역을 한다는 분당횃불교회 이재희 목사의 선교사역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필리핀에서 한국인 아빠로 부터 버림받거나 방치된채, 최하 극빈층으로 전락한 코피노 아이들의 실상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을뿐이었다.
(이재희 목사가) 외국인인 캄보디아나 몽골리아 빈곤층을 돕는것을 열심히 하셨는데 이왕이면 50%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코피노들도 좀 도와주실 의향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목사는 이것 저것 자세한 내용들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했었다.
기자가 알고 있는 필리핀 최하 빈곤층으로 전락해버린 우리와 똑같이 생긴 코피노 아이들의 딱한 이야기들을 대답하는데 이 목사는 말없이 눈시울을 붉히며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러던 10월의 어느날, 이재희 목사를 직접만나 그녀의 해외 선교사역에 관한 이야기들과 그녀의 인생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봤다.
처음 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신건가요?
아닙니다. 저희 집안은 원래 원불교 집안이었어요,
저희 아버지가 너무 좋은 분이셨어요 원불교 독실한 신자시기도 했었고 그래서 자연스레 저희 가족 모두 아버지 처럼 원불교를 믿었어요,
근데 아버지가 (제가) 11살 때 돌아가셨고 저는 막내고, 아버지가 50대때 저를 낳은 거예요. 엄마는 45세시고 그러다 보니 늦둥이인 저는 원불교만 다녔죠. 근데 큰언니가 먼저 교회에 다니면서 자연스레 저도 (큰언니 통해) (기독교로) 전도가 된 거죠. 사실 제나이 22살 12월에 처음 교회라는데를 가보게 된거예요 그리고 23살에 결혼을 한거죠 일찍
그럼 언제 목사가 되겠다고 생각하셨어요?
제가 스물다섯에 딸을 낳았는데 3년후에 어린 딸이 복수가 차오르고 많이 아파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를 했어요 병원에 가도 열이 안내리고 회복이 전혀 안 되는거예요, (딸아이) 몸이 회복이 안되고 치료도 안되고 그러니까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 한테 찾아갔어요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해주고 제발 우리 딸좀 살려달라고 저도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어요 그래서 (딸아이가) 아파서 기도했는데 그때 뭔가 제 마음에 그 어떤 응답이 오더라고요. 근데 막상 내(눈) 앞에는 (딸이)누워 있는 거죠. 다 죽어갔어요. 그랬더니 "네가 신앙의 길을 가고 사명의길을 가면 네 딸 코와 이마에 땀방울 맺히면서 치료해주마" 하고 응답이 오는거예요, 기도 딱 끝나고 우리 딸을 쳐다보는데 진짜 코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거예요, 우리 딸이 이제 혈액순환이 되고 몸이 따뜻해지면서 거짓말처럼 치료가 됐어요.
그랬는데 이 신학이란게 어디 쉽습니까? 힘들지.
그래서 이제 또(신학 공부를 안하면서) 불순종했죠. 그랬더니 이번엔 제가 몸이 아픈거예요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진했더니 결핵성 임파선염이라 그러고,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그냥 병원에서 약 준 거 쓰레기통에 버리고 내가 불순종해서 얻은 거니까 내가 대가 받지 뭐 그러고 이제 신학을 시작 하게 된거예요
그게 몇 살 때셨어요? 신학을 공부 하신게?
그때가 아마 제나이 27살 때였죠, 체념하듯 시작한게
원래 교회를 다니던 분도 아니셨고 세속적인 삶을 사시다가 언니 때문에 전도 받고?
네 그래서 결국엔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된건) 딸 때문에 신학을 시작 한 거예요. 안그랬음 아마 저는 절대 신학의 길을 시작도 하지 않았을거예요, 모성에서 딸을 회복 시켜주셨기에 순종하게 된거죠.
엄마의 마음에서 목회자의 인생이 시작됐군요.
그랬죠.
저는 처음부터 제 고향 시골에서부터 우리집에 방이 여러 개였거든요.
그때부터 형편이 어려운 사람 있으면 (제가) 집에 데리고 와서 저희 집에서 재우고 밥도 챙겨 먹이고 그랬었거든요,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외면하지 못하는건 아마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 않았나 생각해요.
처음 성남에서 천막교회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매일 형편 어려운 분들과 함께 내 가족처럼 (교회에서) 함께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빚도 많이 졌고, 그 분들 먹여 살려야 되고 월세도 내야하고 그래서 성남에서 가락동으로 채소도 주으러 다니고 돈벌수 있는건 뭐 별거 다 했죠.
저는 (교회에서 돌봐야 하는 어려운 이들을 위해) 매일 예배드렸어요.
왜냐하면 우리 교회에서 돌보는 사람들중에는 정신질환자도 있죠. 또 부모님들이 감당 못하는 탈선한 애들도 있었거든요, 가출하거나 거리에서 몸을 팔거나, 정말 누군가 돌봐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서 매일 그분들을 위해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정말 거짓말처럼 교회가 부흥이 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때 그 교회가 어디였어요?
성남 하대원동에 있는 산동네 천막 판자촌 같은 곳이었어요
왜 그 허름한 데서 개척을 하셔요 좋은 데 가서 하셔야지.
제가 돈이 없으니까, 아무래도 허름한 판자 교회에서 돗자리 깔아놓고 부랑자들이랑 우리 애들이랑 같이 생활 했거든요, 그렇게 목회를 했는데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가지니까요, 모란 전철역 같은 데 가면 여자 노숙인들이 있어요, 몸도 팔고 하는 그런 사람들 다 데리고 와서 그냥 (교회에서) 같이 살고 그랬어요.
그때 돌봐주셨던 그분들은 지금 뭐 하세요?
그시절 바닥을 치던 분들이 이제는 다들 잘 살아요, 그리고 대출을 받아서 하대원동에서 방이 98개인 고시텔이 있는 태평동으로 교회를 이사 했죠.
또 거기서 경제적 능력 없는 분들중에, 옛날에는 남편들이 술 마시고 아내들을 많이 때렸었어요. 도박에 빠져서 (아내에게) 돈 가져오라고 막 때리고, 그런 아기들 있는 (힘없고 불쌍한 )여자들을 교회로 데려왔죠.
지금의 여성 쉼터 같은 걸 하신 거네요
그렇죠. 남편이 생활 능력이 없으니까 (교회에서) 온 가족을 데리고 같이 살았죠.
아이들 학비까지 다 내주면서 가족처럼 공동체 생활을 했던시절이었어요.
자녀가 있었잖아요. 목사님은?
네, 제 자녀들이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사실 상처가 많아요.
그때 쉼터에서 지내던 분들의 자녀들을 목사님 자녀들하고 같이 똑같이 먹이고 차별은 안 하셨나요?
사실 그건 우리애들의 상처예요
애들 입장에선 "우리 엄마한테 내가 아들이고 딸인데" 다른 애들과 똑같이 대한다는것에 대해 어린 나이에는 아마 당시에는 큰 상처가 되었을거예요
그래도 애들한테는 그게 습관이 됐죠. 어려서부터 냉장고에 있는 모든 음식들은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 같이 공유하고, 절대로 욕심 부리면 안 된다. 우린 그냥 공동체야 공동체. 그러면서 살았는데, 사실 제 딸 같은 경우는 상처가 특히 많죠.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제법 똑똑한 애인데, 특히 주일 학교 때 딸도 답을 알고 있는데 저는 항상 제 딸이라 답을 말할 기회를 제 딸한테는 절대 주지 못했거든요, 그런것들이 딸애한테는 상처가 되었을거고 그 시기에는 우리 아들 같은 경우에도 함께 생활하던 불량기 있는 성도들이 때리기도 하고 그러니까 상처가 참 많았을텐데도, 우리 아들은 그런 애들도 끌어안고 같이 살았어요.
지금 그 아드님하고 따님은 뭐 하세요?
딸은 미국 장신대학원에서 신학 공부하고 왔어요. 지금 통합 대학원 2학년이고요.
(딸이) 엄마하고 똑같은 길을 가겠네요.
온누리 교회에서 지금 찬양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 딸도 엄마의 길을 똑같이 갈 거고, 아들은 목회의 길을 가야 되긴 하는데, 말씀 드리기 부끄럽지만, 사실은 제 아들을 20살에 제가 반 강제로 결혼시켰어요.
제가 제 아이들한테 어려서부터 혼전순결에 대해 하도 잔소리를 해가지고 얘(아들)가 20살 때 "엄마 나 여자친구 사귀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그러더라고요, 근데 제가 너무 고지식해서 "그럼 결혼을 전제로 사귀어야 하는데?" 이랬잖아요. 근데 아들이 "예 결혼할 거예요"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들이) 교제를 하게 됐는데, 여자친구를 처음 만나는(아들인)데 저는 무조건 결혼하라고 그랬어요. 결혼 목적 아니면 안 된다. 그러니까 얘가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으니까 "예"하고 대답해버린거예요 그래서 아들을 20살때 결혼시켜버렸죠.
며느리 집에서는 놀랐을 텐데요?
(며느리가) 우리 교회 권사님 딸이거든요.
그래서 또 그게 왜 (결혼까지) 되냐면 둘이 좋으니까, 엄마가 안 그러면 교제를 못하게 할 거니까 (아들이) 엄마 말을 잘 들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뭔가가 조금 불안하더라구요. 혹시라도 교회 안에서 목사 아들이 (여자친구랑) 교제하다가 헤어지거나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아들이 20살인데도) 그냥 결혼시켰죠.
굉장히 보수적이세요. 목사님
엄청 보수적인데 지금 많이 내려놨어요.
그래 가지고 우리 아들이 이제 처자식 먹여 살려야 되니까 사업을 했는데 아뿔싸 우리아들이 자기 비서랑 바람이 났네.
"(아들이) 엄마 세상에 나와 보니까 이렇게 좋은 여자들이 많은데 엄마 때문에 (내가 일찍) 결혼해가지고 (내인생이) 이렇게 불행 해진거라고" 그래서 제가 그 비서랑은 (아들하고) 헤어지게 해서, 비서는 캐나다가 집인데 그리로 가서 (좋은 사람이랑) 결혼해가지고 아들 딸, 잘 낳고 살고있고, 그 일 때문에 그때 우리 교회가 풍지박산이 됐잖아요.
무슨일이 있었던거죠?
(주변에) 우리교회 소문이 안 좋게 나서, 목사아들이 말이야 (비서랑 바람이 났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래갖고, 교회 안팎으로 난리가 났었거든요, 근데 그때 마침 (우리 교회에) 이단이 있었더만요, 성도 하나가 이단인데 그 이단이 들어와가지고 부교역자한테 뭐 사바사바하니까 우리교회 신도들이 (이단) 그런 데 빠져가지고 부교역자가 (성도들을) 데리고 나가서 목회하려고 우리교회 성도들 120명을 싹 다 데리고 나갔어요.
그럼 지금은 아드님도 목회자의 길을 가고 계시나요?
(절대) 못 가죠. 자기가 "(비서랑) 바람 한 번 핀 것 때문에 나는 (목회자) 자격 없다." 그러더라구요, 신학대학도 안가고 그러더라구요, 엄마 마음에서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뉘우치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 가는 아들이 언젠가는 목회자의 길을 갔으면 하는 엄마의 마음은 변함이 없어요. 아들은 그 후로 장인어른이 애견카페 하나 차려준게 있는데 잘 적응하고 지금은 평범하게 잘 살고 있어요.
국내에서도 열심히 해야 할 일이 많을텐데, 왜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지셨는지?
원래는 국내도 해요. 해외 같은 경우는 제가 옛날에 국제사랑재단이라고 있었어요. 거기서, 제가 몸 담고 이사로 일하다가 제가 처음 캄보디아를 갔는데, 불쌍한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캄보디아) 후원을 시작했거든요, 예를 들어서 제가 캄보디아에 천만 원을 후원을 했어요. 그럼 그 돈이 (불쌍한 사람들에게) 50%라도 가야 되는데 안 가는거예요, 50%라도 그 사람들에게 갔으면 내 마음이 덜 아팠겠어요, 그랬는데, 내마음처럼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교육시켰던 부목사를 (캄보디아로) 보냈죠.
그리고 거기서 캄보디아인들 다 데리고 젊은 세대들한테 악기도 사서 가리키고 영어부터 한글부터, 악기까지 다 해서 가르쳐 놓으면, 딱 누가 데려가는지 아세요?
한국 선교사들이 내가 월급 얼마(더) 줄 테니 와라 그러면 애들(부목사)이 (다른 교회 선교사에게) 가요. 사실은 돈 때문에 가는겁니다.
그런데 결국엔 가서 이용만 실컷 당하고 다시 저에게 돌아오고, 그런일이 매번 반복되곤 했어요.
그리고는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프놈펜까지 산속에 까지 다 집 지어주고 교회 세우고 했는데요, 의사, 약사 만드는 거라든가 그 지역에 질병을 좀 케어(Care)할 수 있게 약국도 하나 만들고, 근처에 약국이 있으면 직접 방문해서 약도 갖다 주고, 그렇게 캄보디아와 인연이 시작된거예요
캄보디아 사람들의 모습이 짠해서 해외 선교를 하신 분인데, 우리나라 사람이랑 똑같이 생긴 코피노 아이들이 필리핀에서 캄보디아 빈민층 아이들보다 더 못 산다는 걸 저때문에 알게되니 당시 제주에서 울컥했던 거군요.
왜냐하면 (코피노 아이들이) 부모 없이 그런 혼혈아들인데,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평생 아빠를 그리워하고 원망도 하며 살아야 하는 그 불쌍한 코피노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을 왜 내가 진작에 못 했을까? 싶은 마음도 들었고요, 그 불쌍한 아이들이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렇게 힘들게 살고 있는데 제가 얘들을 돕고자 하는 이 생각을 진작에 못했다는거에, 막 내가 외국인도 돕는데, 왜 얘네(코피노)들을 안 돕고 살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니까,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외국인도 돕는데 정말 정말 코피노 아이들은 더 우리랑 가까운데 얘들을 내가 생각을 못했다라는 거, 오죽하면 불쌍한 사람 보면 슬퍼지니까 내가 무슨 갱년기가 왔나 이 정도까지도 내 자신을 의심해 봤어요.
옛날에는 제마음이 너무 불쌍해 하니까 더 돕고 싶은 마음이 왔어요.
근데 지금은 너무 그 불쌍한 걸 보면 제가 막 우울할 만큼 그 마음(도와겠다는)이 오니까, 내가 뭐가 잘못됐나 할 정도로 말이예요, 어디서 갓난 아기 울음소리만 이웃집에서 들려도, 내가 일어나서 찾으러 나간다니까요.
코피노 아이들이 필리핀에서 공부를 잘 마쳐서 대학을 가든 취업을 하려고 한국에 우리 한국인구정책연구회가 보낼 거 아닙니까? 그럼 목사님이 애들도 이렇게 데리고 돌봐 주실 수 있어요?
그럼요. 당연히 코피노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제가 돌봐줘야죠,
저는 엄마가 되어주고, 얘네들은 한국에 와서 그냥 낯선 데 와서 사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서 나를 관심 갖고 나 공부하는 걸 지켜봤던 엄마 같은 목사님이 있는데서 여기서 같이 생활하면서 또 제가 사역하는 교회에서 또 적성이 맞는 애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학교를 가든 직장을 다니든 그래서 그 아이들이 재능이 있는 대로 가르쳐서 사회든 어디든 잘 적응할때까지 우리가 돌봐줄수 있어요 이건 확실하게 약속 드릴께요 우리 횃불교회가 코피노 아이들의 가정이 되어주고 부모가 되어주고 싶어요.
교육자를 하셔야지 왜 목회자가 되셨어요?
아따 이건 또 아니에요. 제가 그랬잖아요. 일선 현장에 계신 교육자만이 진짜 교육자인데 이거 진짜, 그래서 저는 사역자 교육을 많이 시켜요 돈 벌려면 목회 그만하라고 목회도 돈 목적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그런 거 생각하고 목회하려면 당장 때려치우라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까 (주변에서 저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많이 억울함도 당해보고 했는데, 사실 저는 복지에 미쳤었어요.
그래서 복지 때문에 뭘 하려다 보면 교회 안수 집사, 저는 목사잖아요.
그래서 뭐 건축에 대한 관련된 거 맡겨 보잖아요? 그럼 사람들이 공사비 다 떼어 먹고 도망가 버리고, 그런 사람들이 저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곤 했었어요, 그래도 지금은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제 마음이, 내가 너무 사람을 좀 다 좋다고 생각했던 게 아니었던가 싶은 생각이 찾아 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우리 할 수 있는 대로 성도들에게도 그래요.
사업을 해도 이런 어려운 자를 위해서 나눔을 위해서 돈을 벌어라.
나중에 지금은 힘들지 모르지만 나중에 이게 정말 행복이온다.
분당횃불교회가 판교에서 가깝나요? 제가 처음 왔는데, 얼마나 걸릴까요?
20분 정도 거리거든요, 저는 그래서 얘네(코피노)들이 여기(분당횃불교회)를 한번 와서,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나(코피노)를 물심 양면으로 사람 만들어주고 내(코피노)가 정말 한국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을 주신 그분(분당횃불교회 성도들)들을 만나러 한번 오게끔 하는 형태(친정같고 자기들 집 같은 곳)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사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코피노)애들이 한국에 와도 여기(한국)서 이제 기거를 해야 되잖아요.
학교를 다니든 뭐를 하든 믿고 맡길 데가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얘들이 뭐 그렇다고 아직 한굴말은 배워서 한국에 와도 이 동네가 다 낯설 텐데 필리핀하고 동네가 완전 다른데 적응하는 기간 동안, 또 여자애들은 (세상이) 위험하잖아요, 제가 오포에 살거든요. 제가 자주 들여다 보고 해야할테니 거기에다 제가 코피노 아이들이 한국에 오면 방을 얻어줄 생각이예요.
필리핀 코피노교육센터에서 한글,역사,문화교육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고등학교 졸업한 코피노 아이들이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한국에 오게 된다면 목사님이 엄마가 되어줄 수 있겠군요.
저는 정말 그런 거 원해요. 그래서 저는 지금 이제 (코피노 후원을 위한) 재정이 필요한데요, 그동안은 제가 그 어려운 자들을 위해서 세기총(세계한국인기독교총연합회)처럼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적인 상황에 대해서만 후원을 하곤 했는데요, 제가 이번에 세기총 다문화가정 부부 세미나를 제주도에서 했을때 기자님한테 코피노 아이들의 얘기를 처음 듣고 그때 정말 내가 내가 더 가슴이 아팠던 게 진작 알았으면...(코피노 아이들을 외면하는일은 절대 없었을텐데 싶은 아쉬움이 저를 아프게 합니다.)
아무튼 코피노아이들이 한국국적을 받는데 있어서 저는 물론이고 저희 분당 횃불교회 성도님들 모두 최선을 다할거에요
목사님이 계신 분당횃불교회가 코피노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진짜 한국사람이 된 코피노 아이들이 필리핀 가족들에게 갔다가 자기들(코피노)의 조국(한국)으로 돌아 왔을 때 밥 해준 엄마잖아요 목사님은 이제?
그럼요.
우리 분당횃불교회 성도님들도 이재희 목사님도 너무 멋있다.
제가 고난을 막상 당하고 나니까 어려운 자를 도우면서 행복이 오는 거예요. 진짜 이건, 진짜 이게 하나님 나라다.
그 마음이 아, 누군가가 고통을 받게 되고 어디서 아기 울음소리만 나도 막 가슴이 출렁대고 우리들 마음이 언젠가 (우리가 도움을 드렸던) 그분들이 스스로 교회를 찾게 만드는게 우리 분당 햇불교회에서 진행하는 선교 방식입니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을 조건없이 섬겨야 합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자꾸만 그들로부터 뭔가(도움 받았으니 교회 나와라)를 기대해서도 바라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조건없이 나누는것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거죠'
조건을 두고 누군가를 돕는것이 진정 돕는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돕는것이 진짜 행복이고, 그것이 자신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이재희 목사의 마지막 말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기자에게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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