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노후생활]술, 호모사피엔스의 운명 공동체이다

-통계청 21년 기준 19세 이상 성인 음주율 53.5%, 전년대비 1.7% 감소 -술의 찬반론은 인류 모든영역에서 끊임없이 첨예하게 대립 이어져 - 건강의 책임은 개인에게 달려, 좀 더 자신을 무섭게 대해야 -연말 술자리 , 본인의 주량에 대한 디폴트 값을 착각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

2023-11-07     신종국 논설위원

(서울= 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11월, 한 해를 마감하는 이 맘때 쯤이면 어김없이 포장마차가 떠오른다.

이제는 드라마에서 조차 보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알람 시계처럼 몸이 기억하는 술 시는 오차가 없다.

프렌치 패러독스의 신봉자가 되어 건강을 핑계 삼아 기필코 한잔을 하고야 만다.

어제의 숙취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발걸음은 이미 뜨끈한 안주와 마주하기 일쑤다.

더구나 술을 잘 못하는 만만한 직장 후배까지 꼬드겨 “주량은 자주 마시면 늘어난다”는 비과학적인 주장을 펼치며 직장 문화를 왜곡 시킨다.

필자의 과거 직장시절 한 편의 술 이야기이다.

통계청에서 매년 조사하는 음주율은 19세 이상 성인들이 얼마나 건강해 지려는 노력을 했는지 측정하는 대표적인 사회지표 중 하나다.

다행히 21년 기준 음주율은 53.5%로서 전년보다 1.7%로 감소했다.

최근 음주에 대한 세간의 시각은 백해무익이라 평가하고, 적당한 음주가 건강에 이롭다는 말은 허상에 불과하다며 술을 반대하는 사회적 편향 쪽에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다.

음주에 대한 경종은 술이 사회적 문화적 이유로 지나치게 과음용 되는 것을 경고하고 국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함 일 것이다.

 

삽화: 에리온 차, 막걸리 주전자 @ 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의원

 

술은 과학적 시선으로 보면 에탄올이 함유된 음료이다.

실증된 측면에서 술의 시초는 포도주다.

한국의 주세법상 알코올 1도, 1% 이상의 음료로 정의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술 낱말의 어원은   “수불” 물이 불이 붙는 것으로 변한다는 뜻에서 파생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술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인류의 삶에 깊이 뿌리를 내렸고, 신과는 결이 다른 안식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비록 술은 과유불급의 문제가 야기되긴 하지만, 인간의 감정이라는 약점을 위협하는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는 삼국지 속 제갈공명을 자처한다. 

그래서 술은 인류, 호모사피엔스가 존재하는 한 그 운명을 함께 할 것이다.

거의 확정적으로 예단하는 이유도 인류와 필수불가분의 관계라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찬반 논란의 중심에 놓여 있는 상황은 모순이다.

그렇다면 왜 술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까, 우리가 아는 단순한 이유, 폭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염려하는 합리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충동적 파괴행동과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한 자기 몰락의 순간을 통제하지 못하게 만드는 중독질병의 근원이라는 주장에 힘이 실렸을 것이다.

또한 건강과 행복의 질서를 해치는 연관성을 알리는 무알콜론자들의 활발한 연구와 “술에 장사가 없다”는 옛말이 논란을 부추겼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다.

술의 찬반론은 역사, 종교, 사회, 문화등 인류의 모든 영역에서 첨예한 대립을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조선 성종때 최고의 술꾼 박수량의 술 사랑과 영조때 실학자 박지원의 술을 먹은 사람을 개에 비유할 정도로 술에 부정적인 대비가 그러하다.

승려들은 술을 반야탕으로 부르며 지혜의 물이라 하였고, 또한 모든 화의 근원인 화천이라 칭하며 중용을 유지했다.

술을 마시는 것은 곧 사회생활이라는 현대인의 삶에서도 술을 반대하는 소심한 저항으로 술 버리기 생존기술까지 생겼다.

서른을 채 못 채운 나이에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로 사먕한 “목마와숙녀”의 박인환 시인의 안타까운 사연처럼 이는 사람마다

만족하는 음주의 디폴트 값이 다르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이제 비판론자들도 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두주불사에 대한 문제에 집중한다.

관습적인 적당한 음주 규칙을 지키고, 건전한 음주 문화를 내세우며 타협에 손을 내민다.  

또한 불교의 법화경에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다음에는 술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고 하는 격언 정도로 계도에 하는 수준이 전부다.

이와같이 음주에 대한 점점 관대해지는 문화 인식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없지는 않다.

그 일환으로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술을 아예 발암물질, 마약성 물질로 지정했으며, 미국 농무부(USDA) 및 미국복지부(HHS)는 미국인 식이 지침서에 하루기준 남녀 술의 양까지 지정해 권고하며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옹호론자들은 건강상으로 도움이 되는 식품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인류와 뗄 수 없는 술은 일종의 문화 현상이며 식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피력한다. 또한 종교의식이나 제사에서 신과 죽은자와의 접속을 관여하는 변성의식에서 매개체로서 필요성을 주장한다. 

결국 첨예한 줄다리기에서 규칙을 관장하는국가의  대리인들마저 양시양비론으로 결과의 책임을 회피했고 솔로몬의 지혜를 외면한 판결유예를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술은 인간들을 유혹 할 수 있는 법률적 보장과 지위를 획득했다.

술로 인해 발생하는 건강과 파괴, 행복과 불행에 대한 가치소비의 선택은 인류의 의지에 달렸다.

개인이 스스로 통제와 절제라는 무기를 충분히 확보하고 대비하야 무환을 쟁취 할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을 경계하는 수 많은 격언은 인간의 나약한 정신을 바로 세우기 위한 채찍인 셈이다.

탈무드는 악마가 준 선물이라 했고, 세익스피어조차 악마라 불렀다.

반대파 의학자들은 알콜 의존증으로 발전을 근거로 향정신성 마약성 물질이라 경고하지만, 애주가들의 술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윈스턴 처칠의 잃은 것보다 얻은 유익이 많다는 주장이 많이 회자되기에 그렇다.

술과 건강, 팽팽한 줄다리기 끝에는 사람마다 비중을 달리하는 다양한 자기만족의 준거점이 있다.

손실 회피 편향에 따라 술이 주는 행복의 크기도 개인의 체질과 가치관에 따라 천양지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세월 술이 존재해 올 수 있는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부등호를 좀 더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옹호론 쪽에 무게가 실린다.

술의 시간, 연말이 다가온다. 어쩔수 없이 먹는다는 핑계보다는 건강을 위해서 좀 더 무섭게 자신을 대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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