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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후는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 기대수명 연장은 노동할 권리를 강요하고 은퇴의 개념 지도를 바꾸더라도 - 관습에 도전하는 게으를 권리를 지지한다.

[슬기로운 노후생활] 게으를 권리(Right to be lazy)

2024. 03. 24 by 신종국 논설위원

(서울=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 게으를 권리, 마음껏 누려도 될까. 은퇴자 고민의 핵심이다.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의 희극적인 유토피아 게으를 권리는 하루 3시간 이상 노동을 엄격히 금지한다. 그로인해 부족한 사회의 부는 전부 기계가 대신하여 생산하는 이상국가를 주장했다.

일에 대한 격렬한 열정은 후손들의 생명력을 소진했다는 그의 주장에 일부 동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 이유가 우리에게도 생겼다.

19세기만 해도 인구증가로 노동시장의 공급과잉은 노동력 가격하락을 걱정하던 시대였다. 불과 60년만에 인구절벽의 처지에 놓인 우리는 이민청 설립을 걱정하고,  AI시대 기계가 노동력을 대체되고 있으니 안심이란 찬반이 뜨겁기 때문이다.

 

남대문 시장 모습 @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남대문 시장 모습 @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더구나 인구절벽은 미래를 포기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회를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적어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68혁명 세대의 세상을 바꾸기 위한 태도처럼 내부에서 찾을 수 없다면 외부에서 지혜를 끌어오는 방식도 고려해야 할 만큼 절실하다. 우리사회의 인구절벽에 대한 불안감은 고령화 추세에 비례한다. 급기야 이 시대에 은퇴를 맞이하는 세대는 고민이 깊어진다. 노동할 권리의 득세는 게으를 권리를 침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SNS에서 교사로 임용되어 충주로 가게된 딸 덕분에 떠나온 고향에 자주 찾게 되었다며 다니다 보니 고향 사람들이 참 좋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무엇이 좋은지는 말은 안 해도 친구들 모두 알아듣는 눈치다. 답글이 ‘난 늘 좋던데’ , 혹은 새삼 느끼는 중이라며 노후를 위해 지자체가 지원하는 시골집을 공동으로 구입하자는 의견을 내 놓았다.

친구들 일곱 명중 두 사람이 찬성을 했지만, 나머지는 댓글없이 대화가 끝났다. 생각이 많아지는 대목이다. 우리의 일부는 은퇴를 하고도 강요된 노동에 시달리고 있거나, 늘어난 수명은 일 중독을 합리화하고, 병행하여 늘어난 수명만큼 살아 갈 노후 빈곤을 걱정하는 여러 이유처럼 개개별 사정이 녹녹치 않아서 일 것이다. 

이렇듯 노후는 수 많은 문제의 선택으로 부터 시작된다. 또한 시간의 파괴성에 대한 끊임없는 인류의 도전은 게으를 권리의 폭을 제한하는 또다른 문제의 온상이다.

모든 직임에서 물러나기 전, 법정 노동시간을 넘치도록 오버타임을 강행하던 몸은 쉽게 개선되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영원 불멸할 것 같은 극단적으로 건강해진 신체는 노동을 엄격히 금지하는 조항을 지키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직임에서 물러나 마주하는 일상은 너무 낯설다. 유대인의 안식처럼 특별한 교육과 문화를 지키며 살았다면 모를까 보편적인 우리는 무료한 휴식이 난감할 수 밖에 없다. 또는 개개별 성향에 따라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더라도 가나안 농군학교의 근로정신이 무장되었다거나, 카르마(Karma=인연)를 마음에 두고 살고 있다면 게으를 권리와의 간극은 더욱 더 멀다. 

과거 국가부담 없는 연령 65세 기준을 훌쩍 뛰어넘은 기대수명은 이미 은퇴의 개념 지도를 바꾸어 놓았다. 인생에 있어서 주하가 끝나지 않았다는 주장에 의학이 힘을 싣고, 나이 듦의 이유로 포기되던 질서나 풍습, 관습에 도전장을 서슴지 않게 내민다. 누구나 죽는다는 보편성과 죽음의 불가역성에 반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수는 ‘나이가 든다’는 수동적 태도와 ‘나이를 먹는다’는 능동적 태도는 구분짓기 어렵기 때문에 나이 듦의 이점을 누리지도 못하고, 젊음에 대한 애착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추구하는 밸런스를 갖춘 행복한 삶에는 교향악에서 밑바닥을 잡아주는 통주저음 처럼 인생2막의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본원적인 축복이 필요하다. 그 축복이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게으를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논리에 한표를 얹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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