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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과 가치, 문화를 지키며 삶을 마무리 할 수 있어야…

[칼럼] 웰 다잉, 오래산다는 것이 그저 좋기만 할까?

2023. 09. 22 by 신종국 논설위원

(서울=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 우리 모두가 겪어야하는 장수리스크와 세계적으로 급 성장한 K의료 헬스케어 산업, 전자는 골치거리고 후자는 자랑거리다.

사람은 누구나 오래살고 싶어 하면서도 장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양가적이다. 책임 주체별로 장수라는 동일 대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한다.

자식이라면 누구나 부모님의 장수를 염원하지만, 의술에 의존하여 생명을 연장하고 있거나 치매로 요양원 혹은 집에서 케어를 하고 있다면 금전적 문제 등 부양문제는 한 가정의 정상적인 삶을 망가 뜨리는 주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료 헬스산업이 성장하려면 누군가는 아파 줘야한다.  이처럼 어느 입장이냐에 따라 득실의 이유로 시각적 충돌이 발생한다.

자식의 부모부양 능력과 부모의 경제적 여유에 따라 장수는 리스크의 크기를 달리한다.

스스로 노후와 죽음을 감내할 수 있는 재무적 준비를 하였다면 안심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문제다.

그래서 누구나 건강한 장수를 바라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한다. 왜냐하면 굳이 생각한다고 달라 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죽음이 자신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여기고 산다. 하지만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모두는 애써 외면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한번은 꼭 겪어야 하는 숙명같은 일이기에 어떻게 되겠지 하는  태도 보다는 죽음의 질을 높이는 Well-dying 에 대해 논의하고 준비가 필요하다.

죽음을 논하는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을 진일보하게 하는 기본요건이기에 그렇다. 

인간의 수명이 늘긴 했지만 현실은 늘어난 수명의 절반을 병치레를 하며 앓다가 떠나고, 가족의 품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유지한채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만  대부분 요양원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하기에 반드시 겪어야 하는 죽음, 그 누구도 미리 경험해 볼 수 없는 것이기에 막연한 두려움이 크다. 웰 다잉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세대 이야기 조형물 @뉴스뉴스코리 신종국 논설위원
세대 이야기 조형물 @뉴스뉴스코리 신종국 논설위원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웰 다잉은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가치, 문화를 지키며 삶을 마무리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비슷한 용어로 Well-Ending도 있다. 

협의로 연명의료 중단과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의미하며 광의로는 일상에서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준비하는 동시에 현재를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는 과정이라 정의한다. 

우리나라도 웰다잉 논의는 2009년 대법원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장치제거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본격화 하였다. 즉 죽음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법적근거가 갖춰진 셈이다.

죽음의 질을 어떻게 확보할지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현재 우리나라는 법적으로 존엄사는 인정되지만 안락사는 안된다.

또한 다른나라 및 민족에 비해 가족주의가 강한 우리나라는 웰다잉 실현을 위해서는 가족과 생애 마지막 계획 및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원주민 중 나바호족에게도 죽음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격언이 있다. “네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는 울었지만, 세상은 기뻐했다. 네가 죽을 때는 세상은 울어도 너는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라” 참으로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격언이다. 여기서 기뻐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웰다잉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기뻐하며 죽음을 맞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오래사는 것과 행복의 크기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우리 속담에 빌어 먹더라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이 맴도는 이유는 또다른 숙제다. 

벨기에나 스위스 처럼 환자의 의식이 명징한 상태에서  본인의 의지로 요청하는 경우 조력자살을 법으로 허용한다.

그냥 죽고 싶다고 누구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고 치매나 운동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더불어 혼자살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진 경우다. 이런 안락사만이 대안일까.

하지만 세상과 이별할 때가 되었을 때 가능한 한 품위있게 세상과 작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선택지로 쓸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부러운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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