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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대 총선 국민의 역할이 매우 중요, - 개혁과제 골든타임을 더 이상 놓처서는 안된다.

[슬기로운 노후생활] 하데스의 시간

2024. 01. 01 by 신종국 논설위원

(서울=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 2024년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독자 여러분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동해 일출 모습 @ 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동해 일출 모습 @ 뉴스코리아 신종국 논설위원

 

올 해  4월 10일은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날이다. 총선이다. 즉, 여의도로 가는 금배지를 놓고 한 판 겨루는 글래디에이터의 운명이 걸린 큰 장이 선다. 이미 여기저기 날선 총성이 새해 벽두부터 요란하다.

현재 우리나라 정당정치의 행태는 영화 ‘타이탄’을 연상케 한다. 신들의 왕 제우스(배우 리암 니슨 분)와 지옥의 신 하데스(배우  레이프 파인즈 분)사이에서 일어난 형제간 싸움을 담은 영화다.

인간의 사랑으로 영생의 힘을 얻는 제우스와 인간의 배신으로 힘을 얻는 하데스라는 두 축의 치열한 대결 속에 휘말린 인간세상의 혼란과 고통받는 모습이 선거를 치르는 동안 겪어야 하는 우리의 처지와 많이 닮았다. 

그래서 기억 속 역대 총선은 거대한 두 정당의 네거티브 진흙탕 싸움 속에서 하데스 모습의 수 많은 정치인과 마주하게 했다.

제우스의 권위에 반란을 조장하는 하데스의 네거티브 전략은 유권자들에게 그 보다 좋은 안주거리가 없었고, 뒷담화의 사실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22대 총선에서 하데스의 시간을 경계하는 이유다.

정치인은 포퓰리즘에 빠지고 지지자들은 팬덤정치 광신도가 이미 되었다.

양분된 국민의 30%는 서로 적이 되면서 나머지 대다수의 유권자들이 겪어야 하는 혼란과 고통은 너무 과하다. 극한의 네거티브 대립은 정치혐오만 유발할 뿐 득이 없다.

이런 이유로 국민들은 신앙이 다시 활력을 얻어 새롭게 일어나는 부흥처럼 종교적 기적이 정치에도 나타나길 기대한다.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정치 어벤져스 탄생을 꿈꾼다.

그러나 점점 퇴행을 보이는 정치는 배지에 걸맞게 성숙하지 못한다, 여의도 의원 회관에 입주하는 순간, 긴 시간을 낮은 곳에서 절취부심하던  레버넌트는 단순히 정치중독성의 상징만 될 뿐이다.

공약의 유토피아가 허황된 것임을 유권자들은 또다시 실감한다. 정치인도 본성에 충실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대가는 크다. 공약의 현실성은 실종되고, 국민의 뒤통수는 동네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필의 ‘오빠부대’의 팬덤문화가 극성 지지자의 입김과 이득만 반영되는 팬덤정치로 변이되게 한 이유가 이타적 본능 그 자체라는 점이 이기적 유전자 측면에서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본능의 근간은 포퓰리즘이 아닐까. 노련한 정치가들은 그들만의 카르텔, 팬덤에 기대어 신중함과 무모함을 겸비하고 있으며, 기존 지배계급의 질서에 대한 분노를 자극하는 포퓰리즘 전략으로 유권자들의 변덕스런 마음을 흔들고 벌어진 틈 사이에서 기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갖고있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현재성과 바꾸면 뭔가 달라지겠지하는 실낱같은 희망불씨의 간극에서 선택을 주저하는 순간을 그들은 놓칠리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하데스의 시간은 유효기간이 짧다. 선거기간이라는 데드라인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페어 플레이어야 하지만 반칙이 심해지니 입은 상처는 깊다. 보통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언어 폭력에 입은 감정의 상처는 아물더라도 후유증은 좀체 회복되지 못한다. 

그 예로 한자 변(辨/ 辯)에서 찾을 수 있다. 전자는 입장이나 태도를 후자는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을 가릴 때 사용된다.  한자 매울 신(辛)자 사이에 있는 칼(刀)과 말(言)의 역할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문학이나 언론의 영향력을 표현할 때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고 말한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언어폭력은 말(펜)이 날카로운 칼이 될 때를 말한다. 논쟁을 할 때 혐오표현으로 상대를 마음을 해치는 경우다.

대표적으로 총선 출마자 간의 근거없는 마타도어식 말 싸움이 좋은 예다. 실체의 유무를 따져 각자의 이익을 다투는 법정에서 처럼 심판이 없는 경우, 감정 싸움은 끝을 치달을수록 합리적 논쟁을 찾아 볼 수 없다.

감(憾)정을 상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되버린다. 승리를 위해서는 네거티브를 넘어 마타도어식 악수를 주저하지 않는다.

분별은 결국 세치 혀의 말 장난으로 타락한다. 상호간 근거없는 말(펜)은 칼끝이 되어 찌르고 찔리고 나서도 분을 삭이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여기에 더하여 ‘왜’라는 유아기식 질문을 반복적으로 밀어 부치는 경우도 말이 칼날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는데 목적이 있기에 아주 불손하며 유치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공자의 인내도 사라진다.

손주가 할아버지 수염을 당기는 것 같은 도넘은 수준은 장난도 아니다. 그래서 선수가 아닌 유권자도 응원하는 후보에 따라 훙분하고 선수와 동일한 상처를 입는다. 선거의 본질은 사라지고 감정싸움이 주인이다.

우리는 반복되는 선거행태로 말미암아 이기적 프레임 정치, 붕당정치의 태동을 목도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악순환이 멈추지 않는다면 정치와 국민의 뜻이 분리될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앞선다.

심리학에는 ‘네거티브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즉, ‘장점보다는 단점이 크게 보인다’ 는 말이다. 그래서 선거는 이성보다 감성에 가깝다. 네거티브 전략은 결국 정치혐오를 불러오고 지옥의 하데스에게 힘을 실어주는 꼴이다. 이는 유권자들이 형성하는 정치 태도나 참여 행동에 부정적 영향이 미친다. 반면에 일부 논문에서는 부정적인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생업과 가정이 우선인 유권자들에게 네거티브인지 마타도어 인지를 구분하는 혜안까지 요구하는 것은 너무 무례하다.

그런 점에서 올 4월 총선은 국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정치가 나라의 발전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제대국, 문화강국을 유지는 물론 저출산, 고령화, 이민자 증가, 양극화 등  개혁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 국민의 삶에 분명 중요하지만 국민이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붓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역선택 때문에 정치적 보이콧은 더욱 아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역할 두가지를 제시해 본다.

하나는 국민 각자가 거주하는 지역만이라도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정치 역량과 능력을 갖춘 인재를 잘 선택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민의 30%를 적으로 돌려버린 팬덤정치와 우리 스스로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무엇하나 쉽지 않지만 밑져야 본전 아닌가. 고 정주영회장의  ‘이봐 해봤어?’ 라는 어록이 2024년 총선에서 우리 모두의 용기가 되어 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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