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기억속 희미한 얼굴, 고마워서, 미안해서 그리워서 죽기전에 한번쯤 만나 보고싶은 사람이 있으시죠?
『추억여행』 첫번째 사연은 서정음악 그룹 그림물감의 리더이자 작곡가, 제작자였던 최진우(본명 최신묵)의 그림물감의 탄생 비하인드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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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코리아=서울) 디지털뉴스팀 = 그림물감의 노래가 세상에 퍼진 뒤에도, 내 안에는 늘 두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숙희, 그리고 은아.
한 사람은 나의 첫사랑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첫사랑의 동생이자, 나를 향한 순정으로 자신의 세월을 태운 소녀였다.
◆ 사라진 목소리, 남겨진 편지
1990년 겨울, 그림물감 1집이 발표되던 시기 나는 여전히 스무 살이었다.
세상에 첫 앨범을 내놓는다는 설렘보다 마음 한켠의 공허가 더 컸다.
‘이제는 정말 안녕’
그 노래를 부르기로 했던 은아의 목소리가 끝내 녹음실에 남지 못했기 때문이다.
녹음 당일,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도, 이유도 없었다.
그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너무 떨려서, 너무 두려워서 못 갔어”라는 짧은 사과를 전해들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내 곁을 맴돌았다.
언니에게 전해주지 못한 편지, 내게 돌려주지 못한 마음.
그 모든 것이 그녀 안에서 자라난 사랑이었음을 나는 훗날 알게 되었다.
◆ 그녀의 이름으로 쓴 노래
은아가 부르지 못한 노래는 다른 이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언제나 은아의 음색이 그 노래에 스며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오빠, 나 잊지 마.
그때 오빠가 준 벙어리 장갑,
그때 들려주던 노래가,
나한텐 세상 전부였어.”
그 편지는 낡은 기타 케이스 속에서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녀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침묵 속에서 가장 뜨거운 고백을 들었다.
◆ 시나리오로 되살아난 기억 – 〈끝없는 길〉
시간이 흘러,
나는 그때의 이야기를 하나의 시나리오로 썼다.
제목은 〈끝없는 길(Endless Path)〉.
주인공은 불치병 색소성 건피증을 앓는 한 소녀,
햇빛을 볼 수 없어 밤에만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녀는 이야기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빠, 나 잊지 마.
물망초의 꽃말이 ‘나를 잊지 마세요’래.”
그 대사는 현실의 은아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빼서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잃어버리면 안 돼. 이 반지처럼 나도 오빠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싶어.”
그날의 반지는 내 서랍 속에 아직 있다.
세월이 지나 빛은 바랬지만, 그녀의 체온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 물망초의 전설
은아가 내게 해주던 이야기가 있다.
“독일의 도나우강엔 사랑하는 여인에게 꽃을 꺾어주려다
강물에 휩쓸려간 청년이 있었대.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Vergissmeinnicht’ -‘나를 잊지 말아요’였대.”
그녀는 그 이야기를 하며 말했다.
“오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말할지도 몰라. 나를 잊지 말라고.”
그때는 웃으며 넘겼지만,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말이 그녀의 유언 같았다.
◆ 그대들의 이름으로 남은 노래
그림물감의 노래들은 모두 한 시절의 청춘 기록이었다.
‘이제는 정말 안녕’은 짧은 만남과 이별을 알려준 숙희에게,
‘병원이야기’는 병실의 은아에게,
‘그릴 수 없는 노래’는 영화 <카사블랑카>의 잔향에서,
그리고 ‘난 나나나’는 장안동 성당의 작곡가 엄승섭 선배의 곡으로.
그러나 그 모든 노래를 꿰어낸 하나의 실은 언제나 그녀들의 이름이었다.
숙희와 은아,
그 두 이름이 내 인생의 ‘그림물감’이었다.
사랑이 색이라면,
그녀들은 나의 모든 팔레트였다.
◆ 끝없는 길, 아직도 걷고 있다
세월이 흘러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에서도
나는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다.
그림물감의 노래가 흐를 때면
눈 덮인 종로의 그날이 다시 온다.
“숙희야, 은아야…
나 아직도 너희 이름으로 노래하고 있어.
우리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길은 음악으로 이어졌고,
기억으로 남았다.
그녀들의 이름으로 남은 길
그것이 나의 ‘끝없는 길’이었다.
다음 이야기 예고 │ 『추억여행③ – 그림물감 이후, 무대 위로 다시 서다』
1집 발표 이후 사라졌던 멤버들의 행적과, 그림물감이 세상에 남긴 음악적 유산,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잡기까지의 긴 세월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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