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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문화라는 단어가 없는 태국의 문화와 역사

  • 김대민 특파원 thai@newskorea.ne.kr
  • 입력 2021.05.22 17:43
  • 수정 2023.07.06 0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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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관광청 홈페이지
@태국 관광청 홈페이지

 

(방콕=뉴스코리아) 김대민 특파원 = 태국에서의 불교는 일상생활의 일부분이며 태국의 문화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교와 불교의 역활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외국인이 태국의 문화를 언급할 때 동남아시아 전체를 통한 태국 이주의 역사에서 그 행동양식을 참고한다.

태국 문화는 미얀마나 라오스, 베트남 오지의 태국 원주민 , 인도 등 인접 국가와 문화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태국의 민족성은 조상이 같고 다름을 떠나서 태국 주류에 동화되어 있다.

태국이 현대적으로 사회가 변해 가더라도 문화적 삶은 일상생활에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서구화되는 사회속에서 서구의 문물을 조화롭게 받아들여 그들의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어 나가고 있다.

태국어에는 '문화'라는 단어가 없다. 근접한 단어로는 'WATANATHAM'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예술과 의식을 강조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태국의 역사
태국의 초기 거주자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태국의 북동지역에 있는 5,000년 전의 고대 유적지에서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쌀 경작지와 청동유적이 발견되고 있고 이러한 부족들의 후손들이 고대 태국을 지배하였다.

이들은 몬_Mon과 크메르_크메르부족으로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동남아시아의 여러 민족들과의 접촉을 통해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문물들을 받아들이고 이러한 사상들은 태국의 문화적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국 남서부에 거주하였던 태국민족은 몇세기동안에 거쳐 동남아시아로 이주를 하였으며 이지역에서의 그들의 존재에 대해 언급한 기록은 캄보디아에 있는 크메르의 앙코르 왓사원의 12세기 기록에 나타난다. 이기록은 씨암 또는 "진황색"의 민족을 크메르왕족의 식민로 이들을 언급하고 있다.

1238년 태국의 부족장은 크메르로부터 그들의 독립을 선언하고 태국의 중부지방에 위치하는 짜오파야_CHAO PHRAYA, 매남_MAE NAM강의 넓은 계곡지대인 수코타이_SUKHOTHAI에 왕국을 건설하고 수코타이왕조는 14세기에 아유타야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 후 버어마가 아유타야를 침략하고 1767년 수도가 함락되었으나 탁신_TAKSIN과 차크리_CHAKKRI라는 국가적 영웅이 나타나 침략군을 물리치고 차크리왕조를 세워 국가를 통합하였다.


몇 세기동안 태국의 정체성은 태국어와 종교, 왕조의 체계에 의해 발전되어 왔으며 태국인이 TAI, MON, 크메르 등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이 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태국어의 알파벳은 인도어와 크메르어에 기본을 두고 14세기 초에 발전되었다. 14세기 후반 RAMATHIBODI왕조에서 불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불교는 이 후 국가의 사회, 문화, 정치 등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힌두교와 불교신화에 바탕을 둔 태국왕조는 7세기가 넘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재까지도 국민통합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19세기, 유럽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유럽제국주의는 태국왕조에 가장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강의 침략을 받지 않은 태국의 가장 큰 요인은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차이나를 양분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의 태국을 필요로 한 양국의 타협의 결과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태국왕조가 유럽의 열강들과의 다각적인 교섭을 통해 유럽스타일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이러한 개혁들이 국가발전과 세계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국가주권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태국(시암)은 이러한 독립을 위해 값비싼 대가를 치뤘으며 프랑스에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종주권을 내줬으며 영국에 말레이반도의 북쪽지역을 양보해야만 했다.

20세기 초 태국의 정치제도, 군대, 학교, 경제는 급속한 변혁을 경험한다. 수많은 태국인들이 해외에 유학하고 소수의 서구화된 엘리트들이 등장하게 된다.

1932년 군인들과 민간인들에 의한 쿠테타는 절대왕조를 몰락시키고 태국의 입헌제도를 정착시켰다.

그러나 안정적, 민주적 정치제도에의 발전은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치권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군벌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러한 군벌들은 반복적인 쿠테타를 감행하고 오랜 기간 동안 군 계엄령을 공표하게 되었다.

1932년과 1987년에 태국의 열네 번째 헌법에 의해 제정된 국회와 민간 정치인 간의 정쟁은 군사정부를 위한 일종의 꼭두각시역할을 수행했다.

 

사진 : 태국 관광청 홈페이지 발췌
사진 : 태국 관광청 홈페이지 발췌

편집자주: 본 기사는 태국 관광청 자료를 인용하여 작성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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