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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여행 ① 』눈 내리던 종로에서 - 서정음악 그룹 '그림물감' 탄생 비하인드

  • 뉴스코리아(NEWS KOREA) newskorea@newskorea.ne.kr
  • 입력 2025.10.26 23:27
  • 수정 2025.10.2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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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기억속 희미한 얼굴, 고마워서, 미안해서 그리워서 죽기전에  한번쯤 만나 보고싶은 사람이 있으시죠? 

『추억여행』 첫번째 사연은 서정음악 그룹 그림물감의 리더이자 작곡가, 제작자였던 최진우(최신묵)의 그림물감의 탄생 비하인드를 연재합니다.

 

독자사연 보내실곳 : newsjebo@newskorea.ne.kr

 

(뉴스코리아=서울) 디지털뉴스팀 =1986년에서 87년으로 해가 바뀌던 추운 겨울, 종로의 눈내리는 거리에서 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 된다.

 

1987년 KBS 짝꿍 12기 동기들과 베어스타운 스키장에서 by 1987년(사진 왼쪽 제일 뒤가 필자, 오른쪽 제일 앞줄이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안무감독 강옥순 교수)  @최진우
1987년 KBS 짝꿍 12기 동기들과 베어스타운 스키장에서 by 1987년(사진 왼쪽 제일 뒤가 필자, 오른쪽 제일 앞줄이 세계무대에서 한국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안무감독 강옥순 교수)  @최진우

 

눈 내리던 종로에서

1986년의 겨울, 종로3가의 거리엔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다.

그날 나는 세 명의 친구를 ‘형님’으로 둔갑시켜 미팅 자리에 나갔다.

장소는 포시즌이라는 경양식집이었다.

그날 나는 내 인생의 첫사랑을 만났다.

이름은 박숙희.

그녀의 웃음은 겨울의 눈보다 맑았고, 말투는 따뜻했다.

하지만 그날 그녀는 내 친구 상만이의 파트너가 되었다.

나는 소개받기로 한 동갑내기 여학생이 나오지 않아 그저 눈 내리는 종묘공원에서 혼자 남겨졌다.

운명은 언제나 엇갈림 속에서 시작된다.

경양식집을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봤다.

“누나 왜 벌써 나왔어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들어서요.”

우린 53번 버스를 함께 탔다.

나는 받은 위로금으로 그녀에게 짜장면을 사주었고,

그녀는 중곡동 메리놀성당 근처까지 함께 걸었다.

그날 이후, 한 살 차이의 우리 둘은 친구가 되었다.

 

이 시기 단체미팅에서는 폭탄제거라고 해서 미팅 상대중에서 제일 상태가 별로인 사람과 파트너가 되어 자리를 떠나는 이를 위해 미팅 참석자들이 십시일반 착출한 돈으로 일정금액의 금전적 보상을 해준다.

 

이때 나처럼 파트너가 없는 불쌍한 이들을 위해 소정의 교통비와 위로비를 손에 쥐어주면 신속하게 미팅장소를 벗어나야 한다.

 

음악다방에서 DJ 시절 최진우 by 1989년 @최진우
음악다방에서 DJ 시절 최진우 by 1989년 @최진우

 

◆ 첫사랑의 동생, 그리고 한 소녀의 편지

숙희에게 전하지 못한 연애편지를 그녀의 막내동생 은아가 대신 전해주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나는 과자 한 봉지를 사주며 편지 심부름을 부탁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놀라웠다.

그 편지는 한 통도 숙희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훗날 은아는 내 연애편지를 읽고 혼자 간직하다가 모두 태워버렸다고 고백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어린 소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마 나는 숙희의 그림자를 은아에게서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은아는 그 그림자 속에서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 사실을 오랫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농활을 다녀오면서 국수역 대합실에서 by 1988년 @최진우
농활을 다녀오면서 국수역 대합실에서 by 1988년 @최진우

 

◆ 청춘의 무대, 그림물감

 

내가 꿈꾸던 건 음악이었다.

신문 배달, 찹쌀떡 장사, 새벽 우유배달까지 하며 모은 돈으로 작은 악기 하나, 녹음 한 번이 소중했던 시절이었다.

결국 나는 1990년, 서정음악 그룹 ‘그림물감’의 리더이자 작곡가로 데뷔했다.

“이제는 정말 안녕”, “병원이야기”, “그릴 수 없는 노래”...

모두 나의 이야기이자, 숙희와 은아의 기억이 스며든 노래들이었다.

‘이제는 정말 안녕’은 원래 은아의 목소리로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다.

그러나 녹음 당일, 은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긴장과 두려움이 그 소녀를 삼켜버린 것이다.

결국 다른 보컬이 그 노래를 불렀지만, 나는 지금도 그 곡을 들을 때마다 은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착각에 잠긴다.

 

그림물감 1집 그림물감 @최진우
그림물감 1집 그림물감 @최진우

 

영화가 된 기억 ― <끝없는 길>

 

시간이 흘러, 나는 그때의 기억을 한 편의 시나리오로 썼다.

제목은 〈끝없는 길(Endless Path)〉.

은아는 불치병 ‘색소성 건피증’을 앓는 인물로,

햇빛을 볼 수 없어 어둠 속에서 생을 살아가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말했다.

 

“오빠, 나를 잊지 마. 물망초의 꽃말처럼.”

 

그 대사는 실제 은아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그녀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이건 잃어버리면 안 돼. 이 반지처럼 나도 오빠 기억 속에 오래 남고 싶단 말이야.”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했고, 나는 그 사랑을 외면했다.

그 죄책감과 그리움이 영화가 되었다.

 

그림물감 1집 가사지 @최진우
그림물감 1집 가사지 @최진우

 

◆ 물망초의 전설

 

은아는 내게 물망초의 전설을 들려주었다.

“옛날에 한 남자가 도나우강 한가운데 섬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에게 꽃을 꺾어 주려다 급류에 휘말려 죽었대. 그때 남자가 외쳤대. ‘나를 잊지 말아요!’”

그녀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 손에 반지를 쥐여주었다.

그 반지는 지금도 내 서랍 속에 있다.

색이 바래고, 금빛은 희미해졌지만 그날의 온도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물감 1집 앨범 속지 커버 @최진우
그림물감 1집 앨범 속지 커버 @최진우

 

그녀들의 이름으로 남은 길

 

그림물감의 음악은 결국 숙희와 은아, 그 두 이름의 이야기였다.

숙희는 내 첫사랑으로, 은아는 내 사랑의 그림자로.

그들은 현실과 기억, 그리고 예술 속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길이 되었다.

〈끝없는 길〉의 마지막 장면에서 은아는 눈 덮인 산 위에 누워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는다.

그녀의 곁에는 진우 앞으로 부칠 편지봉투들이 흩어져 있다.

그 장면을 쓰던 밤, 

나는 실제 은아가 내게 남긴 마지막 편지를 떠올렸다.

“오빠, 나 잊지 마.
나 이제는 아프지 않아.
이젠 정말 안녕.”

 

1989년 보컬그룹 '공습경보' 활동 당시(사진 왼쪽 기타 들고있는 이가 필자)  by 1989년 @최진우
1989년 보컬그룹 '공습경보' 활동 당시(사진 왼쪽 기타 들고있는 이가 필자)  by 1989년 @최진우

 

◆ 끝없는 길 - Endless Path

그녀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이름은 여전히 내 노래 속에 살아 있다.

그림물감의 멜로디마다 그 시절의 눈빛이 있고, 

‘이제는 정말 안녕’의 후렴마다 그들의 목소리가 있다.

내가 걷는 길 위에는 여전히 그들이 남겨놓은 발자국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길 위에서 오늘도 그들을 부른다.

“숙희야, 은아야…
나 아직도 너희 이름으로 노래하고 있어.
우리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녀와 재회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  by 1988년 @최진우
그녀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흥 여행을 다녀오면서 상봉동 버스 터미널 앞에서  by 1988년 @최진우

 

◆ 〈끝없는 길〉은 단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한 남자가 사랑했던 두 사람,

그리고 그 사랑을 잃은 뒤에도 

음악으로 그들을 다시 불러낸 이야기다.

나는 아직도 믿는다.

사랑이 진짜였다면, 그리움은 끝없는 길을 걸으며, 언젠가 다시 만남으로 이어질 거라고.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물감의 노래처럼,
숙희와 은아의 이름은
오늘도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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