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당 맨 뒷자리에서 졸던 제가
장로 직분을 맡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배고픔이 싫어서 무작정 배웠던 전기 기술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지요.
- 강성전기 성영식 대표 인터뷰 내용 中 -
(뉴스코리아=서울) 최신 기자, 김정호 기자 = 청년들이 대학졸업을 미루고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아무 이유없이 대학에 남고 싶은것은 아니다.
막상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도 취업하기가 쉽지도 않은데다 기성세대와는 다르게 지금의 젊은이들에겐 평생직장 개념도 사라진지 이미 오래다.
청년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뚜렷한 계획이 마땅치 않다보니 졸업을 선택하기보다는 휴학을 반복하면서 졸업을 미루면서 온갖 자격증 시험에 응시하거나 대학원 진학을 선택한다.
그마저도 남학생의 경우엔 군복무를 통해 여학생보다 2년 여 시간을 더 버틴다.
청년들의 꿈과 열정이 사라져 가고 있다.
젊은 청춘들이 아까운 '靑春時代(청춘시대)'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동안 그들이 막상 사회의 구성원으로 합류하는 시기는 20대가 아닌 30대가 되기 일쑤다.
본지는 지금도 고전중인 청춘들에게 치열하게 청춘을 살아야 했던 고단했던 삶의 고비들을 넘겨가며 안정적 생활권에 안착한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들의 인생 계획에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청계천의 한 모퉁이에서 오랜시간 자리해온 성영식 강성전기 대표이자 하늘비전교회 장로를 통해 그의 고단했을법했던 청춘시절의 이야기들을 직접 들어봤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성영식 대표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들판을 뛰놀며 행복했던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그의 부모는 성 대표가 12살이 되던 해에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보겠다는 신념으로 자녀들을 이끌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성 대표 가족의 서울살이는 서대문 문화촌 산꼭대기 판자집에서 부터 그의 고단했던 서울 살이가 시작되었다.
그 시절을 살아온 이들중 누구인들 어렵고 힘든 시간이 아니었겠는가마는 성 대표의 서울 살이는 나고 자라던 정읍의 시골 풍경과는 확연히 달랐다.
다들 사는게 비슷했던 정읍에서의 시골살이와는 다르게 서울에서 마주한 생활들은 학교에 매일 싸가야 하는 도시락의 반찬에서 부터 성 대표의 단촐했던 도시락 반찬과는 비교할수 없을 만큼의 차이가 났으니 말이다.
단칸방에서 6식구가 발인들 제대로 뻗을수 있었겠는가, 보리쌀 한줌과 연탄 하나 챙기기도 벅찬 대 가족의 살림살이는 허기를 달래기엔 가난이라는 족쇄가 늘 발목을 꼭 붙들고 놔줄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철되면 바꿔 입어야할 옷을 제때 준비할수 없었던 그는 여름에도 긴팔의 겨울옷을 입고 있었어야 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 그가 17살이 되던해에 큰 결심을 하고 부모님의 쌈지돈을 훔쳐서 그길로 집을 나섰다.
남들 눈엔 그저 사춘기 소년의 철없는 가출이었겠지만, 성 대표는 17살 소년의 치기어린 반항이 아닌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신념으로 학업마저 그만둔 인생 일대의 모험이자 냉철한 결단이었다.
집을 나온 이후부터 그는 친구 작은 아버지의 전선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하고 닥치는 대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틈틈히 전기기술도 배웠다. 돈도 악착같이 모았다.
그리고 이대로는 학업을 그만둔것이 부끄러워 더는 못참을것 같아 주경야독으로 검정고시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성 대표는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20살이 되던해에 다니던 직장에서 영업을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는 그길로 성수동 일대를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어느새 성 대표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야심차게 신혼초기 시작했던 사업이 거래처의 방만했던 경영으로 고작 6개월만에 부도를 맞게 되었고 제때 대금을 수금하지 못한 성 대표의 회사는 얼떨결에 도산하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게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는 절망했고 좌절했다.
모든것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막 돌을 지난 큰 아들과 아내를 생각하면 이대로 무너질수만은 없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경기도 삼송리에 보증금 없이 월세 5만원의 집을 힘들게 찾았다.
그리고 다시 재기를 위해 친구 사무실에 전화기 한대만 얹어놓고 발로 뛰는 영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4년여를 달린 끝에 서울 변두리에 아내와 자녀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전세로 마련할수 있었다.
지금이야 성 대표가 장로 직분을 가지고 있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쉽게 그에게 왔겠는가.
성 대표는 사실 교회를 처음부터 다닌것은 아니었다.
처음은 아내의 교회행의 왕복 운전기사 노릇부터 시작했다.
그때 성 대표의 아내는 이웃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집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교회까지 버스를 2번씩 갈아 타며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는 아내와 자녀가 안쓰러워 운전기사 노릇을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교회 앞에만 서면 차마 예배당 안으로는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가족들이 예배가 끝나고 나올때까지 차안에서 단잠을 자며 가족들을 기다리는 일상을 매주 반복했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교회 관계자가 차안에서 단잠을 청하려던 성 대표에게 말을 건넨다. "주무실거면 날도 쌀쌀하니 교회 안으로 들어오셔서 편하게 주무세요", 얼떨결에 예배당 제일 뒷자리에 앉아 마음편히 졸기 시작했다. 아무도 뭐라하는 이 없는 그야말로 평온한 단잠을 만끽할수 있는 순간이 시작된 셈이다.
그렇게 교회와의 첫 인연이 시작된 성 대표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교회의 제일 뒷자리에서 중간 자리로, 다시 제일 앞자리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미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화들짝 놀라는것도 잠시.
그는 이미 교회에서 집사를 거쳐 하늘비전교회의 장로직분까지 맡기에 이르른다.
그야말로 전북 정읍의 시골에서 12살에 상경했던 시골 소년이 모진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며 스스로 일궈낸 지금의 모습에 도달하기까지 마음편히 속내를 털어놓으며 눈물 흘릴 여유도 없이 달려왔을터다.
아마, 그마저도 성 대표에게는 사치였을 순간이었을지로 모른다.
그런 그가 지금 교회의 장로이자, 강성전기의 대표로 지난 소년기에서 청년기의 기억을 모처럼 꺼내들었다.
기자는 성 대표에게 물었다. 지금이 있기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준 아내에게 그리고 성 대표를 믿어준 이들과 소중한 고객들에게 한마디를 남겨 달라고...
그는 한마디로 말한다. "모두에게 감사하다"고...
그렇게 청계천에 어느 햇살 좋은날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마무리 되었다.
카메라를 주섬 주섬 챙기는 기자에게 그는 식사라도 같이 하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아쉽게도 다음 인터뷰 일정이 있던지라, 다음을 기약하고 강성전기의 문을 나섰다.
성영식 대표의 강성전기가, 지금보다 더 빛나 있을 10년후에 다시 그를 만나면 지금보다 더 멋있게 익어 있을것만 같아 입가에 웃음이 살며시 배어 묻어 나온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기자 또한 흐뭇했다.
아니 참 대견스러웠다.
혹시라도 여러 힘든 사정들로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스스로 가두지 말고 가슴의 문을 활짝 열고 살아가라고, 포기하지 말라고 성 영식 대표는 당부한다. 힘든 시간이 있기에 웃을 날도 있는것이라면서...
故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일은 많다."를 인용하며, 이 세상에는 정말로 할일도 재미있는 일도 많다고 이 세상 모든 젊은청춘들에게 그는 조언한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성영식 강성전기 대표, 청년의 기억을 더듬다. 영상뉴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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