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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현실에서 예술가와 예술의 역할과 기능

- 한 예술가의 생애와 영향

  • 허승규 기자 mytripmade68@newskorea.ne.kr
  • 입력 2025.02.09 22:25
  • 수정 2025.05.0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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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민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팅가팅가 @갤러리 통큰
마을주민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는 팅가팅가 @갤러리 통큰

 

편집자 주:   전 세계의 핫이슈인 코로나 위기에도 아프리카 에디오피아는 종족간 충돌로 최소 200명 이상의 사망자와 33만명의 실향민이 발생했고, 차드의 대통령은 6번째 연임으로 당선된 그 다음 날 반군 공격으로 사망했다.

올해 1월 우간다의 대통령은 6선 연임, 2월 소말리아의 대통령은 대선을 2년 연기하여 재임기간을 2년 더 연장, 니제르는 쿠테타 진압으로 신정부가 들어서고, 3월 콩고의 대통령은 4선 연임, 4월 지부티의 대통령은 5선 연임, 차드의 대통령은 6선 연임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갔다.

아프리카에선 코로나 방역과 백신보다 평화와 식량(전쟁과 기아)이 더 절박한 현실이다.

각자가 처한 어려운 현실, 특히 코로나 현실에서 예술가와 예술은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을까?

3회에 걸쳐 ①한 예술가의 생애를 조망하고, ②그의 영향과 지향한 예술성을 설명하고, ③대표작품 해석 등을 통해 현실에서 예술가와 예술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뉴스코리아=서울) 허승규 기자 = 여기 한 예술가가 있다. 아프리카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 아프리카 현대 미술의 아버지, 그의 이름을 장르(화풍)로 삼은 아프리카 회화 스타일의 창시자, 『에드워드 사이디 팅가팅가(Edward Saidi Tingatinga)』는 탄자니아 화가로 작가와 동명인 팅가팅가 화풍의 시초로 유명하다.

강렬한 원색과 간결한 터치로 자연, 가족, 일상을 그려내는 독특한 팅가팅가 화풍은 70년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파블로 피카소, 키스 해링도 팅가팅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팅가팅가는 1932년 모잠비크 국경 근처의 탄자니아 남부 툰두루(Tunduru) 지역의 외딴 마을 민두(Mindu)에서 농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1939년 그는 지역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2년 동안 초보적인 교육을 받았고, 나머지 어린 시절은 대부분의 농민 소년들의 방식으로 보냈다.

가정의 일반적인 일을 돕고, 다양한 공예품을 배우고, 가장 중요한 생계수단인 땅을 경작했다.

 

나카파냐에서 10km 떨어진 민두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팅가팅가 @갤러리 통큰
나카파냐에서 10km 떨어진 민두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팅가팅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가 공부했던 민두 초등학교 교실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가 공부했던 민두 초등학교 교실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가 다닌 민두 초등학교 후배들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가 다닌 민두 초등학교 후배들 @갤러리 통큰

 

1955년 팅가팅가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으로 향했고, 식민지(영국) 공무원의 집과 청사에서 정원 관리 등 가사 노동자로 일할 수 있었는데, 탄자니아 독립이 도래하고 고용주가 떠난 1961년까지 머물렀다.

그 6년 동안 팅가팅가는 그가 머물렀던 정부 청사를 주기적으로 페인트하기 위해 온 정부 화가들의 작품을 볼 기회를 가졌다.

그는 매번 천장의 합판(천장판)에 그려지는 밝은 색상과 우아한 붓놀림에 감탄했고, 손을 뻗어보고 싶었지만 그의 정규업무는 시간이 없었다.

1961년 영국으로부터 탄자니아의 독립은 팅가팅가의 직장을 잃게 만들었고, 그는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저기서 일을 찾았지만 결코 영구적이지 않았고 그의 삶은 점점 어려워졌다.

당시 팅가팅가의 삶을 보면 가정과 생계를 위한 돈벌이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일자리를 잃어 노점상을 하기도 하고, 병원에서 세탁일을 하였지만 에드워드는 늘 돈벌이를 고민했다.

팅가팅가는 다르에스살람 도심을 거닐면서 자이르(Zaire, 현재 콩고) 출신의 화가들이 도심 주요 거리에서 값싼 그림을 판매하거나 자이르에서 수입해 온 값싼 그림들이 판매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왜 탄자니아의 예술가들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가? 예술을 통해 우리 예술가들이 조금 더 잘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러한 단순한 생각으로 그의 운명적인 예술적 삶이 시작되었다.

1966년 35세에 팅가팅가는 그는 친구로부터 가정용 페인트와 붓을 구하여 천장판 조각을 찾아 어린시절에 보았던 동물들을 주제로 첫 번째 그림을 만들었다.

그는 그림을 다르에스살람의 Morogoro Stores 밖에 전시했고, 약 10 실링(5원. 현재 5천원 수준)에 판매되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경력의 시작이었다!

작업 초기에는 주로 유럽 관광객들이 선호하는 아프리카의 전형적 상징인 야생동물과 열대의 초원, 사바나 풍경을 그렸고, 이 작품들을 통해서 탄자니아에 거주하는 유럽인과 여행객에게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에 그는 신딤바 댄스* 그룹의 카림바* 연주자인 아가타 마타카(Agata Mataka)와 Peter’s Church에서 결혼했다. 1966년 아들 다우디(Daudi) 팅가팅가, 1968년 딸 마르티나(Martina) 팅가팅가를 낳았다.

 

팅가팅가가 결혼식을 올린 교회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가 결혼식을 올린 교회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아들인 다우디(중간)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아들인 다우디(중간)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의 딸인 마르티나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의 딸인 마르티나 @갤러리 통큰

 

1968년 팅가팅가는 무힘빌리(Muhimbili) 공립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하게 되었고, 청소부와 예술가 2개의 직업을 가지면서 예술에 최대한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일했다.  

예술가 친구들이 그에게 재료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고, 그는 곧 가정용 페인트에서 더 나은 재료로 변경했다.

여전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그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 건축자재인 메이소나이트(plywood의 한 종류)에 자전거에 사용하는 에나멜 페인트로 선명하고 강렬한 색감을 표현했다.

또한 구매자들이 그림을 편리하게 갖고 갈 수 있도록 휴대하기 편한 작은 사이즈(60x60cm)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동물, 새, 가족, 사원, 풍경, 생활, 신화속의 이야기 등 친숙하고 익숙한 것들을 단순하고 장식적인 표현기법으로 담아낸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단순하지만 눈에 띄는 방식으로 그는 자연과 주위의 구성요소를 원근감없이 배열했고, 형식과 패턴을 과장하여 주제의 특정 속성을 강조했다. 이 순진하고 신선한 접근 방식은 구매자들의 관심을 끌고 공감되었다.

 

팅가팅가 작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작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작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작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부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부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작가 사진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작가 사진 @갤러리 통큰

 

1970년 그가 NDC로부터 그의 첫 주문을 받았을 때, 예술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무힘빌리 의료센터를 떠났다.

그리고 향후 팅가팅가 예술협동조합(TACS. Tingatinga Arts Co-operative Society)으로 조직될 견습생과 추종자 그룹을 모았다. 

 

팅가팅가 스튜디오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스튜디오 @갤러리 통큰

 

1971년 NDC(National Development Corporation. 국가 개발 협력)의 자회사인 National Arts Council은 그의 독특한 작품을 도심의 전시관에 전시·판매하는 계약을 맺었다.

그가 NDC로부터 그의 첫 주문을 받았을 때, 예술에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 무힘빌리 의료센터를 떠났다.

National Arts Council은 그의 작품들을 탄자니아 최대 규모 무역박람회인 Saba Saba 국제무역박람회에 전시하기로 결정했고, 박람회 파빌리온에 전시가 이뤄졌다.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게 되었고, 입소문으로 짧은 시간 안에 관광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특히 유럽인들에게 뜨거운 관심을 받아 외국인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그의 그림이 팔리게 되었고, 1972년에는 런던 코먼웰스갤러리 전시에서 작품 100점이 팔렸다.

1972년 다르에스살람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팅가팅가는 검문하는 경찰을 피해 도망가던 면허정지된 택시기사를 향한 경찰의 잘못된 총격으로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의 인생과 짧은 그림 경력은 마감하게 된다.

팅가팅가가 무힘빌리 공립병원에서 숨질 때, 곁에는 테도가 있었다. 

 

팅가팅가 묘지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묘지 @갤러리 통큰

 

1968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972년까지 4년 동안의 작가 활동은 짧았지만, 그의 독특한 화풍은 70년대 유럽에서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작품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팅가팅가 미술에 대한 수 많은 영상과 인쇄물이 있는데, 2011년 영국 BBC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시리즈 “팅가팅가 이야기(TingaTinga Tales)”가 EBS에서 방영되기도 했다.

또 펭귄북스의 자회사인 Puffin Books 등 전 세계 여러 출판사에서 팅가팅가 동화책을 출판했다. 지금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팅가팅가 동화책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동화책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동화책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동화책 @갤러리 통큰

 

갑작스러웠던 팅가팅가의 죽음은 그의 그림을 사랑했던 제자들과 많은 견습생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그들은 팅가팅가 회화 예술의 영혼을 이어나가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1990년 7월, 팅가팅가 예술협동조합(TACS)을 설립하였다.

팅가팅가의 첫 제자는 그의 남동생 아자바(Ajaba), 아데우시(Adeusi), 린다(Linda), 테도(Tedo) 및 음파타(Mpata)이다.

그의 인생과 짧은 그림 경력은 끝났지만, 이들로 인해 팅가팅가의 그림은 여전히 널리 알려지고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현재 팅가팅가 예술은 1990년대 대부분 자연 환경에 국한되었던 주제에서 벗어나 2000년대부터 도시 생활, 다민족 사회, 사회지구적 가치 등 새로운 주제들이 대두되었고, 원근법과 같은 새로운 표현기법이 들어섰다.

화려한 색채의 그림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흑백그림도 자유롭게 생산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점차 국경을 넘어 동아프리카 전체, 특히 케냐와 탄자니아를 중심으로 팅가팅가 예술이 자리잡고 확산되었다.

오늘날 탄자니아에는 팅가팅가와 비슷한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상업 예술가가 많이 있고, 장르를 따르지만 자신의 주제로 자리잡은 재능있는 화가도 많다.

 

팅가팅가의 후예들의 공동작업장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의 후예들의 공동작업장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제자들의 공동작업장 @갤러리 통큰
팅가팅가 제자들의 공동작업장 @갤러리 통큰

 

탄자니아 최대의 도시 다르에스살람 서쪽의 코코해변 인근에 자리해 있는 팅가팅가 예술협동조합(TACS)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는 거의 300명에 육박할 정도로 동아프리카 사회 내에 영향력있는 커다란 단체가 되었다.

이곳은 관광객에도 필수 관광코스로 꼽힌다. 팅가팅가풍의 다양한 그림을 만날 수 있고, 저렴한 가격에 공예품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여느 기념품 가게에서나 흔하게 파는 게 동물 그림이지만, 협동조합 작가들의 솜씨가 가장 믿음직하다.

이처럼 예술은 방송, 출판, 관광, 쇼핑, 커뮤니티 상생 뿐만 아니라 사회지구적 가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 

황무지와 다름없던 탄자니아 미술계에 씨앗을 심고 숲을 만들어내어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 선구자로 불리우는 팅가팅가.

사후 그의 제자들은 팅가팅가 예술협동조합(TACS)을 설립하여 현재까지도 꾸준한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그들의 작업환경은 여전히 열악하지만 그 안에서 창조되는 사회적 가치와 팅가팅가 스타일의 작품들은 언제까지나 아프리카를 방문한 이방인들의 눈을 사로잡고 있다.

 

아프리카 미술전 (2021.4..16~5.17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아프리카 미술전 (2021.4..16~5.17 인사동 마루아트센터)

 



*신딤바 댄스(sindimba dance. 허리에 캉가를 두르고 엉덩이를 흔드는 춤)

*캉가(Kanga. 보자기)는 가로 1.5미터, 세로 1미터 가량의 무명천에 다양하고 화려한 무늬와 격언을 써넣은 아프리카 여인들의 전통 의상. 동아프리카, 특히 탄자니아에서 캉가는 삶의 일부이자 오랜 문화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캉가는 우리나라의 보자기와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보통 2개의 캉가를 한 묶음으로 하여 하나는 머리를 감싸는데 사용하고 하나는 치마처럼 사용합니다. 캉가는 주로 여자들이 입는데, 집에서는 거의 캉가만 입고 생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외출할 때도 속에 옷을 입고 밖에 캉가를 걸치고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캉가는 겉옷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모자처럼 만들어 머리에 쓰기도 하고 아기를 업는 포대기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바닥에 깔고 앉는 용도나 덮고 자는 용도로도 쓰입니다. 남자들도 집에서는 캉가를 걸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캉가는 옷, 포대기, 커튼, 이불, 벽장식 등 그 용도가 무한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널리 사용됩니다.

*카림바(kalimba. 보통 호리병박의 공명 상자에 붙인 금속조각이나 나무조각을 긁어 연주하는 아프리카 민속음악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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